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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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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저자가 인공지능 할아버지인 이유

컴퓨터 출현과 별개로 인공지능 원리에 대한 구상은 17세기에 이미 존재… 기계공학보다는 ‘인간 마음’의 문제
등록 2024-08-16 21:28 수정 2024-08-21 20:30
프리츠 랑의 1927년작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의 한 장면.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프리츠 랑의 1927년작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의 한 장면.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인공지능은 유럽 계몽주의 문명의 정점에서 출현한 개념이다. 알고 보면 최근에 와서 갑자기 인공지능이란 용어가 등장한 것도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50년대 시작됐다. 인공지능이라는 말의 용례는 1956년 미국 뉴햄프셔주 그래프턴 카운티 하노버에 있는 다트머스대학에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인공지능 원리에 대한 구상은 이미 유럽에서 17세기 인간의 마음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인식이 발생하면서 등장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1985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인공지능’에서 고파이(GOFAI, 멋진 구식 인공지능·Good Old-Fashioned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말을 만들어낸 존 호글런드는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머스 홉스를 인공지능의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인간 뇌의 작동 방식 연구하는 인공지능학

홉스는 국가를 “인공 인간”이라고 지칭하면서 자연의 힘 앞에서 보잘것없는 개체인 인간이 국가라는 인공의 신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봤다. 후일 증기기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홉스에게 국가는 자연의 힘을 인간의 편의에 따라 이용해서 능력을 신장하는 사이보그였다. 이때 홉스가 생각한 인간 능력의 극대화는 논리수학적인 추론화를 통해 가능했다. 이 수학적 추론의 능력을 홉스는 이성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능력의 구현을 리바이어던이라는 인공지능의 괴물에 비유했다. 홉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공지능의 원리에 대한 구상은 컴퓨터의 출현과 별개로 이뤄졌다.

앞서 지적했듯이, 찰스 배비지의 차분기와 해석기(제1524호 참조)는 170년이 지난 뒤 퍼스널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현실화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의 문제는 결코 컴퓨터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처럼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문과와 이과로 분리해놓고, 인공지능을 이공계 출신만 다뤄야 하는 주제인 양 오인하는 것은 큰 문제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인공지능을 인문학적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기술적 대상에 대한 사유 자체를 배척하는 편향도 마찬가지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날 인공지능은 컴퓨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게 됐지만, 그 이유는 인공지능이 애초부터 공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구상은 기계공학적인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문제다. 오늘날 컴퓨터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인공지능도 사실상 인간의 마음 구조를 복제하는 과정이고, 그렇기에 인공지능학은 인간의 마음을 만들어내는 핵심 기관인 뇌의 작동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 개발의 역사에 심리학이 개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1세기 인공지능의 이론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퍼셉트론’(뇌의 학습 기능을 모델화한 기계) 개념을 제시한 프랭크 로젠블랫도 심리학자였다. 19세기에 인류 최초로 뇌의 혈류를 측정해서 인간 심리가 두뇌 활동과 관련 있다고 밝힌 당사자는 오늘날 흔히 상상하듯이 대학의 공학 연구자가 아니라 안젤로 모소라는 이탈리아 사업가였다. 모소의 발견을 바탕으로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집필한 책이 바로 심리철학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심리학의 원리’다. 이 책에서 제임스는 모소의 발견을 통해 인간 심리의 중심은 신이 아니라 뇌라는 사실을 밝혔고, 도덕철학의 이원론을 해소한 유물론적인 심리의 과학이 가능해졌다고 진단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공지능에 대한 상상은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괴물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인간보다 부족한 능력을 가진 로봇이었다. 앞의 사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이나 지킬 박사의 하이드 같은 경우이고, 뒤의 사례는 ‘메트로폴리스’의 여성 로봇이나 ‘스타워즈’의 R2D2 혹은 C-3PO에 해당할 것이다. 이들은 인간을 닮았지만, 완벽하게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상상의 힘은 인공지능 기술이 놀랍게 발전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얼마 전 국외 대학에서 인공지능과 관련해서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청중 한 분이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복잡하고 섬세한 인간의 능력을 따라올 수 없기에 여전히 인간의 창의성은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프리츠 랑의 1927년작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의 한 장면.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프리츠 랑의 1927년작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의 한 장면.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21세기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가 됐다. 인간보다 더 섬세하게 느끼고, 인간보다 더 잘 보고, 인간보다 더 잘 생각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면 남는 문제는 무엇일까. 그 문제는 도대체 인공지능의 인간적인 면모를 규정하는 그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 역시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사이버네틱스와 정보이론이 등장했던 1950년대 이래로 “신의 죽음”에 이은 “인간의 죽음” 또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이 논의를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개념으로 고등교육의 인문학 전공이나 교양 과정에서 가르친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의 창의성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가보겠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주제와 관련한 대중적인 논의는 대체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프로그램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진정한 창의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도 대부분 이렇게 프로그램에 불과한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인간의 고유한 창의성을 과소평가하게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이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공지능은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분명 사전에 구축한 데이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한계의 문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인간의 경우 인공지능과 달리 확증편향에 시달려서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창의성과 프로그래밍의 관계

흥미로운 인지 실험이 있다. 농구공을 주고받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공을 몇 번 주고받는지 세어보라고 요청하면 대부분 정확하게 맞히지만 질문을 바꿔서 화면 한복판을 가로질러 간 고릴라 인형 복장의 사람을 봤는지 물으면 대부분 맞히지 못한다. 이 사실을 알려주고 다시 그 장면을 보여주면 정말 거짓말처럼 앞서 봤던 그 장면에 문제의 고릴라 인형 복장을 한 사람이 나타난다. 이런 실험 결과가 잘 보여주듯, 인간의 인지 능력 역시 인공지능 못지않게 조건에 따라 편향적이다. 인간의 인지도 인공지능처럼 특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가 바로 특정하게 작동하는 인간의 뇌신경 연결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인공지능의 역설과 관련이 있다. 철학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항공기의 운항을 제어하는 시스템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운항 시스템을 설명하면서 “이 시스템은 악천후에도 항공기가 최적으로 운항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돼 있다”고 말할 것이다. 분명히 이 발화는 운항 시스템 전체에 대한 진술이면서 동시에 특정 프로그램에 맞춰 작동하는 개별 시스템에 대한 진술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운항 시스템이 최적으로 작동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는 기준은 그 특정한 시스템이 사전 설계한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르는지 그 여부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운항 시스템이 설정한 프로그램에서 벗어나서 작동한다면 고장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특정 운항 시스템은 자유로운 창의성이 없는 방식으로 설계돼야 고장 없이 잘 작동하는 좋은 시스템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결과야 어떠하든 이런 운항 시스템을 창의적으로 작동하게 프로그램을 짤 수도 있다. 다만 아무도 그런 “창의적인 기계”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영화 ‘스타워즈’의 C-3PO(왼쪽)와 R2D2. 출처 루커스필름

영화 ‘스타워즈’의 C-3PO(왼쪽)와 R2D2. 출처 루커스필름


이 논리를 인간에게 적용해보자. 우리는 “모든 인간은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태어날 때부터 프로그램돼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옛날이면 신이 인간을 그렇게 설계했다고 했겠지만, 요즘은 아마도 진화 과정이 우리 유전자를 그렇게 프로그램했다고 말해야 더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말하든 결론은 같다. 인간의 창의성은 프로그램의 결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한 논리에 근거해서 본다면, 이 발화에 내재한 역설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창의성과 프로그램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창의적이려면 프로그램을 거부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인공지능은 창의적이지 않다”고 말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창의성을 프로그램과 대척점에 놓는다. 그러나 앞서 제시했듯이, 우리는 얼마든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창의적인 기계”의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 그렇다면 기계도 창의적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야말로 자연의 컴퓨터라는 진실

물론 여기에 대해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의 창의성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특정한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인공지능을 작동시키는 컴퓨터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인공지능은 진화라는 무한한 생성의 과정을 거쳐 주어진 인간의 창의성을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논리 역시 창의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창의적인 결과물을 과거에 주어진 것과 다르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찾는다. 낭만주의자들이 훌륭하게 본보기를 보였듯이, 창의성은 전통에 대한 반발을 낳는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앞서 이야기한 “창의적 기계”의 딜레마에서 맴돌 뿐이다. 우리가 우려하는 인공지능의 위험 중 하나가 프로그램을 벗어나서 폭주하는 기계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특이점”에 대한 우려는 다분히 낭만주의적 상상의 결과물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 “고장 난 기계”야말로 인공지능의 창의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진짜 문제는 인공지능과 창의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바로 자연의 컴퓨터라는 진실에 있다. 1950년대 출현한 사이버네틱스와 정보이론은 이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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