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너무 더워 간단한 조리조차 엄두가 안 난다. 편의점과 마트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이 잦다. 오늘도 편의점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냉장 매대를 살핀다. 오, 돼지강정. 몹시 허기진데다 예상 가능한 맛이라 바로 집어든다. 귀가하자마자 에어컨 켜고, 대충 손 씻고, 전자레인지에 돼지강정을 돌린다. 벗겨뒀던 포장지는 바로 버리지 않고 식탁에 함께 둔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셰프 △△강정’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본다. 또 나만 모르는 셰프, 나만 모르는 맛집이 있구나.
그 셰프가 운영한다는 유명 식당을 검색하고, 식당 메뉴판에서 가격을 확인하고, 식당 방문 후기 블로그 글까지 훑는다. 한 블로거는 음식이 기대 이하였다고 무심히 평한다. 저렇게 직접 실패해볼 수 있는 여유야말로 요즘의 여유지, 생각하며 검색창을 보다가 그 셰프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채널A)에 출연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고 말했다는 헤드라인을 본다. 어쩐지 멋쩍어져 남은 조각들을 서둘러 삼킨다.
“우리가 호텔은 못 가도, 호텔 케이크는 먹을 수 있잖아?” 2024년 초 편의점에서 본 포스터의 카피 문구다. 이런 식으로 못 가도, 아니 못 가는 줄도 몰랐던 ‘관념적 맛집’을 몇 년 전부터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순회 중이다. 코로나19 이후로 온갖 유명 음식점이나 셰프와 콜라보(협업)를 한 상품들이 편의점에 진열됐기 때문이다. 분당 리안베이커리, 이태원 장진우식당, 종로 송정식당, 을지로 카페호랑이, 성수베이글…. 그렇게 내 방은 관념적 ‘핫플’이 됐다.
이런 걸 레스토랑 간편식(RMR·Restaurant Meal Replacement)이라 부른다고 한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기존 가정 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에서 ‘퀄리티’를 내세운 버전이라는 설명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셰프 아이피(IP, 지식재산권)’ 시장까지 형성돼 빠르게 성장 중이라고 한다. 한 미식 플랫폼에서는 삼원가든을 비롯해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인 ‘권숙수’ 등 무려 158개(2023년 초 기준) 셰프 IP를 확보했다는 소식도 봤다. 관념적 로컬 여행지, 관념적 노포(老鋪)들이 속속 개점 중이다.
심지어 관념적 맛, 관념적 시간까지 편의점에서 모두 해결 가능하다. 우선 관념적 맛. 2023년 편의점을 휩쓸었던 음식 시리즈는 ‘먹태청양마요’ ‘아사히 생맥’이었다. 새우깡, 포테이토칩, 심지어 라면까지 온갖 곳에서 안주와 맥주의 생생함을 구현했다. 비슷한 결로 노가리, 다코야키 등이 꾸준히 과자의 향을 입혀 출시됐고 생레몬 하이볼도 인기를 끌었다.
좀 놀랐던 게, 이런 과자 봉지를 뜯으면 정말로 내 앞에 먹태가 놓인 듯한 향이 풍겨 온다. 그저 인공착향료로서 진정한 음식의 흉내일 뿐이라고 비하하기에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긴 하다. 전통적인 음식과 과자 개념을 달리 감각할 때 익숙하면서도 낯선 쾌감이 있다. 게다가 동물권과 기후위기 이슈로 대체육이 활발히 개발돼 출시되는 상황에서 인공적인 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안주 과자와 캔 생맥주의 핵심적인 형식은 ‘홀로’다. 포차 가서 혼자 술잔을 기울일 레벨이 아니고서야, 원래 노가리와 먹태 그리고 생맥주와 하이볼은 함께의 경험이다. 이런 흐름은 역시 편의점에서 투게더 아이스크림이 미니 냉장고에 들어갈 미니 사이즈로 출시되고, 귤을 한 알에 450원씩(!) 판매하는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관념적 시간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복날 즈음에는 삼계탕 컵라면 1+1 행사도 했는데 이렇게 절기 음식이 간편식이 아닌 과자나 라면으로, 자두 같은 제철 과일이 음료수로,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초 기념 케이크가 조각으로, 두바이 초콜릿과 같은 요즘 디저트가 가성비 버전으로 체험 가능하다.
물론 혼자서나마 또 간편히 이 시간들을 챙길 수 있는 건 다행이지만 친구나 가족, 조직과 공동체에 속하면 함께, 오히려 더 가성비 있게 누릴 시간들이다. 나도 얼마 전 한 연구 단체에 가입한 덕에 그 공간에서 요즘 핫하다는(그러나 비싼) 두바이 초콜릿과 ‘요아정’(요거트 아이스크림의 정석)을 맛볼 수 있게 됐고 한 스타트업 회사를 다닐 때 당시 핫한 디저트였던 노티드 도넛을 맛별로, 물릴 정도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혼밥 애호가로서 혼밥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홀로화’ ‘편의화’를 그저 쿨한 트렌드로 여길 수 없는 맥락도 분명하다.
관념적 여름이라는 말처럼 점점 모든 날씨가 관념화되는 시기. 기후 인플레이션까지 합세해 물가가 치솟을 때 그 관념을 ‘진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소수가 돼간다.(물론 ‘관념적 무엇’은 ‘부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관념적 언덕(힐 스테이트), 관념적 성채(캐슬)가 여기저기 넘쳐나니까.) ‘경험경제’라는 개념이 대두한 것처럼, 이 관념적 음식들은 아무리 맛 구현이 뛰어나더라도 ‘경험’이라는 성분의 함유량은 제로(zero)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휴양지 맛집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은 이 간편식들을 먹더라도 추체험이자 간편함이겠지만, 그럴 자원이나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기분과 감성 정도만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일종의 ‘사치의 낙수효과’도 있다. 이왕 가성비 음식 먹는 거, 좀더 퀄리티가 확보되고 언젠가는 가볼 식당과 메뉴를 간접 경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미묘한 박탈의 양상은 이런 거다. 1인가구로서 도시의 틈바구니에서 쫓겨가며 음식을 때우는 감각 같은 것. 그 맛집을 예약하기 위해서는 대기 앱을 능숙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대기에 대기라는 이중 대기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 그 모든 것은 단지 돈과 시간적 여유뿐 아니라 함께 갈 친구나 가족이나 애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
혼밥을 먹으며 밥친구 콘텐츠로서 영화 요약 리뷰 영상을 보고, 사랑이라는 감정과 관계가 리스크가 된 사회에서 연애 프로그램으로 대리만족한다. 관념적 친구, 관념적 서사, 관념적 사랑까지. 구독 경제의 대두가 현대 도시인의 삶의 증상이듯, 관념 경제의 부상도 그런 증상의 일종으로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글·사진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청춘의 봄비’는 이번으로 휴재합니다. 도우리 작가는 재충전 뒤에 돌아옵니다. 그간 수고하신 도우리 작가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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