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도 처음에 같이 웃었다. 그룹 어반자카파의 보컬 조현아씨가 솔로로 컴백한 <줄게> 무대 영상에 달린 조롱 댓글들 말이다. 평소 실력파 가수로 정평이 난 조현아씨의 노래를 종종 찾아 듣던 입장에서 그 무대는 충격적이었다. 불안정한 가창력은 물론이고 무대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 보였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사람들이 더 주목한 것은 어색한 퍼포먼스와 가사 그리고 ‘헤메코’(헤어·메이크업·코디)였다. 이 때문에 그 무대 영상은 ‘제2의 <깡>’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하지만 가수 비와 달리 조현아씨의 댓글에는 ‘아줌마’ 운운하는 인신공격성·여성혐오적 내용이 가득했다. 그렇게 불어나는 양상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겨우 정신을 꽉 잡았다.
조롱이 며칠간 이어진 뒤 조현아씨는 최선의 방식으로 해명해냈다. 유튜브 <어반자카파> 채널에서 다른 두 멤버 사이에 앉아 몇몇 수위 낮은 악플을 ‘유쾌하게’ 읽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당사자가 쿨하게 넘겼으니, 조현아씨 그리고 그가 부른 다른 노래가 주목받았으니 괜찮은 걸까? 저열히 뱉어진 디지털 침들, 은밀히 웃었던 내 마음은 그대로 면죄부를 얻는 걸까?
요즘 시대 조롱의 핵심은 ‘길티’다. 길티란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의 줄임말 이상으로 밈화된 감정이다. 길티 콘텐츠와 함께 언급되는 수식어가 ‘배꼽 때 냄새’ ‘정수리 냄새’ ‘피지 짜는 짤’ 등이다. 그 대상이 보기 싫은데도, 아니 바로 그래서 자꾸 찾게 되는 콘텐츠라는 뜻이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비(B)대면 데이트’ 시리즈가 대표적이었는데, 매력적이기는커녕 부담스러운 데이트 상대지만 자기가 ‘치명적인 줄 알고’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이 주요 웃음 포인트였다. 길티의 핵심은 실제 자기와 ‘추구미’(자신이 추구하는 미적 스타일) 사이의 간극이 크지만 자기 객관화가 안 돼 보일 때 느끼는 공감성 수치로, 창피스러운 상황이되 정작 당사자는 몰라야 한다.
길티의 전신은 중2병, 허세충, 흑역사, 싸이월드 감성 등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주로 내면에 관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손발의 오그라듦’으로, 그걸 지켜보는 자의 존재가 소멸할 것 같은 기분으로 표현됐다. 그렇지만 이제는 배꼽 때, 정수리 냄새나 피지 짜는 짤과 같이 당사자의 역겨움으로 여겨진다. 모두 갖고 있지만 드러내면 안 되는 면을 자각하지 못하고 당당히 풍기는 역겨움. 그런 면들은 이제 흑역사처럼 자연스러운 과거가 아니라 그저 계속 성찰하고 관리할 영역이 돼버렸다.
예전에 사람들은 ‘관종’(관심 종자)을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제 파악 안 되는’ 관종에 주목한다. 추구미를 완벽히 수행해내면 ‘주접 댓글’을 받지만, 혹여 분수에 안 맞는 욕망을 ‘상향’해 추구해선 안 된다. 혹은 자기 객관화하기를 넘어 셀프 희화화 수준까지 가야 온라인 주민들의 불편함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길티 당사자는 그냥 ‘창피한 사람’이 아니라 삼중의 수치가 생긴다. 첫째는 일단 자신을 우습게 드러냈다는 수치, 둘째는 자기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수치, 셋째는 그래서 나쁘다는 수치 말이다.
그 조롱들에서 느껴지는 디지털 단합의 분위기는 과거 <케이팝스타> ‘악마의 편집’, 사기범 전청조씨의 밈, <나는 솔로> 빌런까지, 네티즌들이 점점 단련되고 진화해온 조롱의 역사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일단 욕할 명분이 주어지면 그의 모든 결점과 실수를 하이퍼리얼리즘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며 묘사하고 패러디한다. 배꼽 때를 굳이 후비며 피지를 굳이 포케이(4K) 화질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욕은 어떤 한 특징을 싸잡아 말했다. 개똥녀, ○○충과 같은 말로. 이제 그러한 명명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시적 묘사가 들어가야 한다. 내 모든 과거 순간까지 완벽해야 한다. 그 하이퍼리얼리즘에, 나르시시즘, 경계선 인격장애, 회피형 등 심리학 언어까지 거의 ‘프로파일링’ 수준으로 동원된다. 심지어 이제 사람들은 이렇게 망신을 당한 사람이 대응할 방안까지 선수 쳐 조롱한다. 우울증을 호소하면 예전에는 조금 가라앉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로 방패 삼지 말라고까지 말한다.
조롱을 받는 당사자들에게 지금까지 최선의 해결책은 악플들을 ‘유쾌하게 넘기기’다. 적극적으로 맞대응하면 대중과 ‘기 싸움 하려 든다’고 단죄되고, 상처받은 티 내면 ‘쿨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나는 솔로> 출연자 라이브 방송처럼 그 상처받은 표정을 실시간으로 낱낱이 목격하고 나서야 길티 감정이 최종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정당화한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노이즈 마케팅으로 승화하는 게 프로라고, 유쾌하게 넘기는 걸 보니 쿨하다고. 하지만 제이티비시2(JTBC2)에서 2019년 방영한 예능 <악플의 밤>에 설리가 등장했다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그 모든 것에 결코 유쾌해질 리 없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분수에 안 맞는 추구미’가 왜 유독 우리가 피하고 싶은 위치, 자기혐오와 수치의 자리가 됐을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존재의 자유로움과 해방감, 또 다른 창의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단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제’를 감히 넘보는 것에 대한 단죄라는 점에서, 일종의 신분주의의 냄새가 읽힌다. 규범적 외모와 몸매 그리고 자본과 지위까지 갖춘 사람만이 근사한 차림과 멋진 콘셉트, 무엇보다 ‘나르시시즘’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쁜 척’ ‘치명적인 척’이 된다. 문제는 이 ‘주제’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런 규범으로 아픈 시대를 건너는 데 필요한 건 그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의 주제 침범하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더 필요한 건 더 많은 ‘척’들, 더 구체적인 ‘나르시시즘’일지 모른다. 우리는 항상 ‘님, 그 정도 아니세요’를 넘고 ‘수요 없는 공급’을 준 이들 덕에 별다르게 아름다운 음률과 이야기의 세계로 넘어가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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