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점쟁이는 ‘분명 아들’이라고 확신했다. 1970년대 가부장 문화가 강한 경상도였다. 의사는 말했다. “축하합니다. 딸입니더.” 아기를 받아든 부모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인형놀이보다 칼싸움을 주로 하며 ‘머스마’처럼 자랐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끈덕지게 싸우면서도 잘 웃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가 됐다.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가 <우린 춤추면서 싸우지>(은행나무 펴냄)라는 에세이를 썼다. 1997년 피시(PC)통신 동성애자 인권모임 또하나의사랑에서 활동을 시작해 1998년 잡지사들이 속속 폐간하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대에 덮어놓고 한국 첫 퀴어 잡지 <버디>를 창간해 출판사까지 차렸다. 이제야 첫 에세이라니. 종종 출간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손사래를 쳤다는 그다. 이 책은 “의욕이 갑자기 튀어오른 날” 출판사 편집자가 운 좋게 출간 제안 전자우편을 보낸 덕에 발간될 수 있었다.
한채윤은 2002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를 설립해 전무후무한 한국의 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을 만들어 한국 퀴어운동사의 사료를 모았고, 별의별상담연구소와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등 여러 성소수자 인권단체를 인큐베이팅했다. 대표적 활동은 2001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으로 20년 넘게 일해온 것이다. 2001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연 퀴어퍼레이드 ‘마디그라’에 다녀온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마디그라는 세계에서도 이름난 퀴어퍼레이드였고, 7500명이 참여한 그때의 행렬에 방송인이자 사업가 홍석천씨가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이 행사에 다녀온 직후 저자는 제2회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행사를 치르고 있다.
책의 앞쪽은 퀴어퍼레이드와 비온뒤무지개재단 설립을 준비하면서 서울시, 경찰, 구청, 법무부와 줄다리기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막으려는 중앙정부, 지방정부, 경찰의 집요한 생트집도 기상천외하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싸움을 이어가고 이겨가는 과정을 보면 탄식과 질문이 절로 나온다. 이 지난한 활동을 어떻게 계속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책임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은 이 책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단 하나의 문장이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였다고 한다.
독자가 지닌 젠더·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과 관점에 따라 이 책은 사뭇 다르게 읽힐 듯하다. 저자가 몸으로 겪은 한국 퀴어운동사의 중층적 면이 촘촘히 기록됐기 때문이다. 강의를 나갈 때마다 받는 ‘동성애는 후천적인가요 선천적인가요’라는 질문, 16년 전부터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 정부와 국회 그리고 시민사회가 움직인 과정, 같은 편인 듯했던 사람들과의 갈등, ‘생물학적 여성만 입장 가능’한 규칙으로 트랜스젠더를 배제했을 때 ‘여성’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어느 대목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 따져가며 읽는다면 책의 의미는 한층 배가될 듯싶다. 더 좋은 시민이 되고 더 좋은 사랑을 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 책을 거쳐가길 바란다.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저자는 “어떻게 20년 넘게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로, 동성애자로 살아왔는지 사람들이 자주 묻는데, 이 책은 그 질문의 답변”이라며 “끈질기게 행복하자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했던 경험담을 포함해, 개인사를 담은 5부는 가장 쓰기 힘들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눈에 띈다. 세상의 이분법을 교란하는 자, 경계에 선 자의 외로움과 무게를 견디는 인내심을 함께 읽을 수 있는 대목이 많아 비슷한 일로 마음을 다친 경험자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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