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보니 무려 네 번이었다. 젊은 시절의 이순금이 20대에 일본 수사기관에 구속된 횟수가 말이다. 푸른 청춘을 경찰서와 형무소를 오가며 다 보낸 셈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젊음이었다. 여느 사람이라면 한 번 검거된 경험만으로도 위축됐을 것이다.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악몽일 터였다. 하지만 이순금(1912~?)은 달랐다. 여성이었고, 중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층이었는데도 그랬다.
이순금은 교육 기회가 극히 제한됐던 일제 식민지 시기에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일신의 안전과 출세를 위해 나아갈 길이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더 넓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젊음을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전 민족 해방운동을 위하여, 특히 근로인민의 이익과 생활 향상을 위하여” 바쳤다.1
첫 사달이 난 것은 동덕여고보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2월이었다. 20살 때였다. 졸업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는데 그만 ‘RS협의회’라는 학생 비밀결사가 발각되고 말았다. RS란 ‘Reading Society’의 약어로 독서회를 뜻했다. 서울 시내 각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 10개교 안에 학생들로 이뤄진 비밀 독서회가 연계망을 구축했는데 그것이 드러났다. 종로경찰서를 주무 기관으로 하는 일본 경찰은 학생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이순금도 그 속에 포함됐다. 동덕여고보 학생으로는 뒷날 저명한 여성 사회주의자로 등장하는 박진홍, 이종희, 이효정 등이 함께 연루됐다.
수사는 혹독했다. 취조 중에 사망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 사건의 혐의자 가운데 중앙고보 4학년생 박풍직(21)이 그만 옥사하고 말았다.2
사망 원인은 질병이라고 보도됐다. ‘각기증’ 탓이라고 했다. 각기증은 비타민 B1의 결핍으로 생기는 영양실조 질환으로서 다리가 붓고 마비되며 맥박이 빨라지는 증세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돌연사를 가져오는 원인이 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보도 내용을 믿지 않았다. 구타와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이순금의 가담 정도를 낮게 평가했다. 그는 이듬해 2월15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RS협의회 사건으로 검찰에 넘겨진 형사범은 19명이었고, 이순금을 포함한 다른 19명은 불기소 혹은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3
이순금은 3개월 가까운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벗어나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덕분에 동덕여고보 졸업식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1932년 3월25일자로 발행된 제18회 졸업 앨범 속에 앳된 얼굴의 이순금 사진이 실렸다. 수줍은 듯 위로 치뜬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동그스름한 얼굴이 복스럽게 생겼다. 정면 가르마가 가지런하고, 짙은 색 저고리 옷깃에 새하얀 동정이 조화를 이뤘다.
이순금의 여학교 졸업을 지인 가운데 누군들 축하하지 않았겠으랴. 하지만 누구보다 가장 기뻐할 이는 어머니 김남이(1875~1931)였을 것이다. 살아 있었더라면 말이다. 어머니는 졸업 전해에 유명을 달리했다. 아버지 이종락(1870~1942)의 소실이었다. 언양에서 울산읍으로 넘어가는 새고개 길목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던 김남이는 음식 솜씨와 사업 수완이 좋았다고 한다.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부동산 구입에 썼다. 고향인 언양 인근에 논밭을 3만7천 평이나 사뒀고, 서울에도 자녀 교육을 위해 주택을 마련했다.4
서울 익선동 33-17번지에 거주용 주택을 산 것은 거의 전적으로 김남이의 공로였다. 어머니 김남이는 단지 주택 구매에만 머물지 않았다. 딸의 동덕여고보 학업을 도우려 상경했다. 이순금이 여학교 교육을 온전히 받을 수 있었던 동력은 김남이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이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건강을 잃었다. 1931년 7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순금의 졸업 전년도였다.
이순금이 두 번째로 구속된 때는 동덕여고보 졸업 이듬해였다. 22살 되던 해, 1933년 2월 체포됐다. 체포에 나선 자들은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였다. ‘조선반제동맹경성조직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된 혐의였다. 줄여 ‘반제동맹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으로 피의자 43명이 검사국에 송치됐다. 이들의 죄목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양 방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조선반제동맹이라는 상급기관을 조직하려 했다는 데 있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서울 시내 각급 학교 속에 비밀 독서회 13개를 뿌리내리는 성과를 올렸다.
이 사건에서도 이순금은 학생운동 방면을 맡았다.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유포했으며, 학생 대중이 시위운동과 거리 진출을 꾀하도록 이끌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시기에 눈길이 간다.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지 1년이 된 때였다. 그럼에도 이순금은 여전히 비밀 독서회 조직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벌써 직업적 혁명가의 면모가 엿보인다.
반제동맹 사건에서 남매가 함께 구속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순금과 이관술(1902~1950)이 그들이다. 동덕여고보 역사·지리 담당 교원이던 이관술은 이순금보다 10살 많은 배다른 오빠였다.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 이관술은 동생 이순금에게는 학교 선생님이기도 하고, 집안의 친오빠이기도 하며, 비밀결사 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삼중의 인연으로 묶인, 가장 신뢰하는 동지였다.
반제동맹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동대문경찰서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진한 색 저고리 차림이다. 머리는 쪽을 쪄올리고 앞가르마를 탔다. 쪽을 찐 때문인지 젊은 새댁 같은 이미지다. 미간을 모으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위축된 속에서도 고집스레 뭔가를 다짐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양쪽 귀 옆으로 머리카락이 삐져나왔으나 미처 다듬지 못했다. 옷고름도 단정하지 않고 삐죽이 빗들어 맸다. 초췌한 모습이다. 가혹한 경찰 취조의 와중에 그가 겪는 위기감과 위축감이 엿보인다.
이번에도 이순금의 위법성 정도는 낮게 평가됐다. 경성지방법원 사사키 검사는 오빠 이관술을 기소자 명단에 올려놓았지만, 이순금은 불기소 처분자 명단에 포함했다.
세 번째 구속은 그 이듬해에 이뤄졌다. 이순금은 1934년 1월20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 경관대에 체포됐다. 이번에도 비밀결사 가담 혐의였다. 해마다 한 번꼴로 체포를 되풀이해 겪는 양상이다. 그러나 혐의 내용이 달라졌다. 이제는 학생운동이 아니라 노동운동 관련 혐의였다. 경성고무공장의 10·20대 여성노동자들을 규합해 비밀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순금이 학생운동을 벗어나 노동운동에 발을 내디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금이 가담한 비밀결사는 ‘이재유 그룹’이었다. 이재유가 이끌던 일련의 비밀결사 ‘경성 트로이카’ ‘조선공산당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을 합쳐 부르는 용어가 ‘이재유 그룹’이다. 이순금은 그 그룹의 일원으로서 노동운동 조직화에 투신했던 것이다.
이번 구속은 오래갔다. 이재유의 체포와 탈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경찰의 취조가 더 장기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1934년 9월 한때 석방되기도 했지만 이순금은 이재유 그룹을 뒤쫓는 경찰의 수사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935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미결 구금 기간을 포함해 전후 3년6개월간 수감돼야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찍은 사진이 있다. 1936년 6월30일에 촬영했다. 이순금은 일본식 기모노를 닮은 여성용 죄수복을 입고 있다. 배경이 붉은 벽돌담이다. 특유의 도톰한 볼살이 좀 빠진 듯 보인다. 경찰 취조실에서 보여주던 날카로운 긴장감이 누그러진 표정이다. 입술은 다물었지만 눈매가 덜 날카롭다. 수형자 카드에 이순금의 인적 정보가 적혀 있다. 키는 154㎝였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고, 출소 예정일이 1937년 7월14일이라 기재돼 있다.
이순금의 역대 구속 사안 가운데 가장 놀랍고 애석한 것은 1937년 7월18일 ‘여의도 사건’일 듯하다. 여의도 사건이란 비밀활동을 위해 서울 여의도에서 접선하던 이순금·이관술 남매가 폭우로 갑자기 불어난 한강물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될 위기에 놓인 사건을 말한다. 이관술은 요행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순금은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순금은 그길로 다시 투옥됐다. 출옥 나흘 만에 또다시 옥중에 갇히게 됐다. 이렇다 할 ‘범죄행위’가 없는데 어떻게 수감됐을까? 일종의 괘씸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이 사활을 걸고 수년째 추적하는 비밀운동의 지도자 이관술을 눈앞에서 놓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이순금은 장장 9개월간이나 수감됐다.
1938년 4월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죄수복이 아니라 작은 물방울무늬가 점점이 박힌 여성용 저고리를 입었다. 왼쪽으로 몸을 약간 비튼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형무소 수감 중에 찍힌 다른 사진들과 달리 여유마저 느껴진다. 감옥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래 벌써 7년의 세월이 지난 때였다. 겨우 10대를 벗어난 소녀가 어느덧 삼십을 바라보는 연령에 이르렀다. 사진 속 얼굴에 나이가 느껴진다. 이순금의 청춘은 지하운동 현장과 형무소 속에서 저물어갔다.
참고 문헌
1. 이순금,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듣고서’, <현대일보> 1946년 7월15일
2. ‘RS사건의 박풍직 옥사’, <동아일보> 1932년 2월26일
3. ‘RS협의회 관계자 18명, 今朝에 송국’, <동아일보> 1932년 2월16일
4.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8쪽, 2006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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