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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공족, 그나마 카페에서 존엄을 유지한다

[카공족 놀이] 도시 전체의 기능이 압축된 카페라는 공간, 공부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청년 취약층
등록 2023-04-15 01:36 수정 2023-04-20 01:53
카공족 갈등을 희화화한 스케치 코미디. 유튜브 채널 ‘너덜트’ 갈무리

카공족 갈등을 희화화한 스케치 코미디. 유튜브 채널 ‘너덜트’ 갈무리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주고받는 선물은 ‘스타벅스 커피 기프티콘’이 됐다. 카페 음료는 미국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사회적 성수’라고 일컬었듯, 목을 축이는 용도를 넘어 만남과 대화의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페는 사교공간을 넘어 휴식처, 놀이터, 숙박, 여행지, 사무실, 공연장과 미술관 등 대부분의 공간 기능을 흡수해왔다. 스타벅스가 2019년부터 매장 간판에서 ‘COFFEE’(커피)를 뗀 것은 상징적인 방침이었다. 이렇게 카페의 외연이 확장되다보니 커피를 팔지 않더라도 카페를 표방하는 공간(본죽&비빔밥 카페, 방탈출 카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카페’로 부르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카페는 정치적으로도 첨예한 공간이다. 10여 년 전 스타벅스 가는 여성을 가리키는 ‘된장녀’ 멸칭을 시작으로, 서울 한남동의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으로 대표되는 젠트리피케이션(원주민 내몰림)의 격전지가 됐다가, 지금은 남편에게 기생하며 카페에서 아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는다는 ‘맘충’ 프레임과 어린이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의 확산지가 됐다. 그리고 최근에는 카페에 장시간 머무르며 공부하거나 업무를 보는 사람을 일컫는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빌런(악당)으로 부상했다.

자영업자들은 아침에 문 열자 마자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고작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충전하고 와이파이 쓰고 화장실 쓰는 사람들을 성토한다. 소비자들도 ‘공부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 않냐, 우리도 눈치를 많이 본다’며 하소연한다.

회의실이고 학교고 집인 ‘초연결 공간’ 카페

카공족은 ‘자영업자 대 소비자’의 문제일까. 카공족에게 자영업자 처지가 되어 생각하라는 훈계는 많지만 매장 임대료나 배달 플랫폼 수수료, 대리점 갑질 문제를 다루는 기사에는 ‘자영업자만 힘든 거 아니다’라는 내용의 댓글이 많이 달린다. ‘카페는 본래 대화하는 곳’이라며 카공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현대의 카페가 다양한 공간 기능을 담당한다는 걸 모르고 그러는 걸까.

‘카공족’이 문제로 떠오른 것은 몇 년 됐지만, 지금처럼 카페의 최고 민폐 집단으로 꼽힌 건 아니었다. 감염병 대유행에 따라 재택근무와 화상수업의 확산이 큰 몫을 했다. 안 그래도 여러 공간 기능을 떠맡던 카페인데, 줌 화상회의나 슬랙 메신저 등 온라인 협업 도구가 마련되며 집과 일터, 학교의 기능까지 ‘초연결’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카공족 갈등은 (사무직 남성 부양자 중심으로) 일과 생활이 가능하도록 발명된 도시 전체의 기능이 카페 공간으로 압축되면서 ‘공간 과부하’ 속에 터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민폐 카공족을 엄벌하는 ‘참교육’을 시전해도 빌런의 등장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

카페에서 카공족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모습. 이번 원고도 카페뿐 아니라 정체 중인 버스 안, 도서관, 친구 작업실을 전전하며 썼다. 도우리 작가

카페에서 카공족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모습. 이번 원고도 카페뿐 아니라 정체 중인 버스 안, 도서관, 친구 작업실을 전전하며 썼다. 도우리 작가

왜 하필 공부하는 행위가 타깃이 됐을까? ‘청년=공부하는 존재’라는 전제 때문일까. 카페에서는 공부하는 학생뿐 아니라 나처럼 작업하는 프리랜서도 있고,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직장인도 있다. 그러면 직업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카장족’(카페를 장시간 이용하는 사람들)이란 이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왜 특히 청년에 대해, 일이나 자기계발도 공부라고 한데 묶어버리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공부란 ‘시험공부’의 준말로, 합격 이후의 미래를 목표로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는 레토릭이다. 나는 오랫동안 프리랜서 작가보다, 취준생·공시생·대학원 입시 준비생 등 때에 맞춰 돌려가며 ‘학생’으로 나를 소개했는데, 그편이 사람들에게 안심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은 ‘공부’로만 상상된다.

학교·기업·사회·정치는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

그래서 ‘-생’은 격려받되 임시적 상태를 전제하기에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하지만 고시 준비를 명목으로 최저 주거 기준으로 설계된 고시원이 일반적 주거 형태가 됐듯, 카공족도 사회구성원의 일반적인 존재 방식이 돼버렸다. 그리고 고시원을 탈출해야 온전한 구성원이 되듯, 빨리 카공족 상태를 탈출하지 않으면 ‘청년답지 않은 청년’이 된다.

청년을 포함한 대다수의 고용취약계층은 카페에서 학교·기업·사회·정치에서 제공받지 못한 서비스를 스스로 해낸다. 각종 학원에 등록하고, ‘경력 있는 신입’이 되기 위해 ‘랜선 사수’ 서비스를 구독하고, 시간제한이 걸린 줌 무료 버전을 고수하느라 회의 흐름이 계속 끊기는 걸 감수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피스 유료 버전으로 업데이트할 여력이 없어 조악한 유사 프로그램을 사용하다 작업물을 날리고, 사무실 대신 방에 각종 사무용품을 사들이거나 큰 백팩을 등딱지처럼 메고 여러 카페를 전전한 끝에 VIP 회원으로 등극하면서. 이마저도 모자라 지하철에서 애써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며 노트북을 펼치면서.

2016년 서울 청년 거버넌스 플랫폼인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는 이미 “서울시는 왜 청년문제를 스타벅스에 맡겨두고 계십니까?”라고 비판한 바 있다. 청년 주거 빈곤이 카공족 문제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카공족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공부해서 정규직이나 전문직 신분을 획득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최고라는 ‘삶의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해야 한다. 바꿔 말해 공부하지 않는 존재와 삶을 존중해야 한다.

카페에는 홈리스 거실리스 사무실리스 탕비실리스들이…

“말이 카공족이지 카페 거지고 노숙자다.” 카공족 갈등을 다룬 기사 아래 700개에 이르는 ‘좋아요’를 받은 댓글이다. 주거난으로 길거리에 내몰린 홈리스처럼 지금 카페에는 거실리스, 사무실리스, 탕비실리스, 도서관리스, 사물함리스, 공원리스, 직업리스가 앉아 있다. 그 대댓글에는 이런 내용이 달렸다. “실제로 내 주변에 그런 사람 있다. 실직했는데 추운 겨울에 갈 곳이 없어 노트북 하나 들고 카페 가서 공부하는 척 시간을 때웠다는….” 그러니까 카공족이란 지금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그나마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분이 아닐까.

덧. 공부하지 않는 존재와 삶을 존중하는 법은 무엇일까. 우선 무업 상태의 사람들에게 가상의 회사원 소속을 제공하는 커뮤니티 플랫폼인 ‘니트 컴퍼니’와 같은 시도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또 독자분들께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터디 카페 또는 일자리센터로 전환될 위기에 놓인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이슈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청춘의 봄비: 같은 비라도 어디에 내리느냐에 따라 풍경과 수해로 나뉘는 것처럼, 흥미롭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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