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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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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친구, 음악은 동반자

자폐장애인 은성호씨와 그 가족의 11년을 담은 <녹턴>
등록 2022-08-23 14:17 수정 2022-08-24 00:35
자폐 음악가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가운데)와 어머니 손민서씨(왼쪽), 정관조 감독이 2022년 8월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한자리에 섰다.

자폐 음악가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가운데)와 어머니 손민서씨(왼쪽), 정관조 감독이 2022년 8월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한자리에 섰다.

여기 ‘이상한’ 음악가가 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졌지만 피아노와 클라리넷, 두 악기 모두 능숙해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도 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의 날짜와 요일을 척척 맞힐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하다. 글의 제목이나 문장을 모으는 것을 좋아해 2만 개를 수집했다. 애국가를 좋아하는데 특히 “1996년, EBS에서 나온 애국가가 좋다”고 할 정도로 세심한 취향을 가졌다.

생후 36개월에 자폐 진단, 엄마의 더블 인생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인 우영우(박은빈)와 닮았다. 그러나 친한 친구도 있고, 연애도 하는 우영우의 이야기는 그에게 다른 세상 같다. 그에겐 음악 말곤 ‘사람 친구’가 없다. 일상생활도 어렵다. 그는 혼자 머리를 감거나 면도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재킷의 단추를 잠그는 것도 서툴다. 대중교통을 타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큰 소리를 내서 어머니를 난처하게 한다. 자폐장애인의 현실은 드라마보다 다큐에 가깝다. 음악가 은성호(38)씨의 이야기다.

은성호씨는 자폐성 장애(2급)를 가진 중증장애인이다. 생후 36개월에 자폐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다 우연히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초등학교 1학년 음악 시간에 선생님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 바로 따라 친 것을 계기로 피아노를 시작했다. 지금은 발달장애인 연주자들의 사회적 협동조합인 ‘드림위드앙상블’의 멤버로 활동하며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연주한다.

2022년 8월18일 개봉한 <녹턴>은 은성호씨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11년간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영화다. 이 영화는 2020년 제42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8월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정관조 감독과 은성호씨, 은성호씨의 어머니 손민서씨를 함께 만났다.

“엄마는 엄마 인생 (은성호 몫까지) 더블로 산 거야.” 은성호씨의 동생 은건기씨의 영화 속 대사처럼, 영화는 은성호씨를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는 어머니의 인생을 좇는다. 그러나 단순히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과 그에 따른 감동만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비장애인 동생이 느끼는 소외감과 슬픔이다. “동생이 고등학생일 때 처음 만났는데, 성호가 음악 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더라.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희생하고 돕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고 솔직했다.”(정관조 감독)

독립해 살면서 가끔 어머니 집에 오는 은건기씨는 오랜만에 형을 만나도 반가워하기는커녕 말을 걸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두 사람이 대화하게끔 상황을 만들려 하지만 동생은 되레 화내고 어머니와 싸운다. 형과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쳤던 은건기씨는 어머니의 지원과 관심이 모두 형에게 가는 것이 그저 서운할 뿐이다. “어머니의 입장도, 건기의 입장도 이해되고 그 사이에서 아무 말 없이 있어야 하는 성호의 처지도 안타까웠다. 그래도 관객은 어머니나 건기의 입장은 공감하지만 성호 마음은 모르지 않나. 어쩌면 제일 외로운 사람이 성호일 것이다.”(정관조 감독)

동생과 함께 간 러시아 공연

드라마였다면 형제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결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극적인 화해는 없지만 두 사람은 은성호씨가 어머니 없이 동생과 러시아로 공연하러 가면서 다른 국면을 맞는다. 동생은 은성호씨의 면도를 도와주고 공연 준비도 도우면서 매니저 역할을 한다. 이때 은성호씨가 동생에게 “까불지 마”라고 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 “성호가 건기에게 까불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자신이 ‘형’임을 아는 것 같아서.”(손민서씨)

은성호씨가 형 같다고 느낀 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공연에서 성호씨가 <바람이 머무는 날>을 동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클라리넷으로 연주한다. 은건기씨는 “처음으로 통하는 느낌이 들었고 형 같았다”고 말한다. 동생과 함께 한 공연이 은성호씨에게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영화에서 동생이랑 같이 (연주)하는 장면 멋있었어요. 또 하고 싶어요.”(은성호씨)

형제가 조금씩 성장하고 가까워지는 동안 어머니는 점점 나이 들어간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손민서씨의 삶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처음 어머님을 만났을 때 어머님은 자기 인생이 없었고, 절망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호라는 존재가 축복이라고 태도를 바꾸었고 그게 와닿았다. 성호의 음악을 통해 선물받은 부분도 있다는 점을 잘 그려내고 싶었다.”(정관조 감독) “나한테 내 인생이 없다고 하지만 이게 결국 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엄마라서 그런 것 같다.”(손민서씨)

손민서씨는 ‘우영우 신드롬’ 덕분에 자폐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 알려져서 기쁘다. “드라마에서도 자폐가 어떤 장애인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잘 드러내줘서 좋았다. 이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성호는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주의자다. 물론 부모들끼리 쓰는 말로 무언가에 꽂혀서 ‘그분’이 왔을 땐 감당하기 어렵지만 그럴 땐 잠시만 기다려주면 된다. 무조건 색안경 끼고 보지 않았으면 한다.”

우영우가 연애하는 장면을 보면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편견에 갇혀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봤다. “우리 애가 연애할 수 있을 거란 상상을 안 해봤다. 내 편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지 싶어 조심스럽다.”(손민서씨)

‘사람 친구’ 대신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친구

은성호씨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일까, 물었다. 은성호씨가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에요”라고 답했다. 옆에서 어머니 손민서씨가 “학교에서 배운 말인데 저 말이 좋았는지 질문이 나올 때마다 써먹는다”고 덧붙였다. 은성호씨가 이내 조금 더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사람 친구가 없어서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친구예요. 음악은 저한테 소중한 거예요.”

글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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