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공기와 곰팡이, 창틈으로 침입하는 낯선 이의 시선, 집에 이르기까지 마주치는 유흥가의 불빛 같은 것들. 왜 이런 집이어야 하는지 세상은 잘 답하지 않았다. 왜 이런 집을 위해 노동하고, 세를 내고, 갱신에 마음 졸이고, 집주인의 지청구를 듣고, 항변하지 못했는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집값의 등락을 말했다. ‘내 집 마련’은 의심할 수 없는 꿈이니까. 그 꿈을 향해 잠시 거기 머무는 것뿐이니까. 이 슬픔이 임시라는 건 위로 같기도 했다. 꿈 혹은 욕망이 한데 모였다고 알려지고, 집값이 오르고, 금리도 오르고, 도저히 소유에 가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듯하여 더는 꿈에서 위로를 구할 수 없는데. 아직 명료한 답은 없다. ‘내 집 마련’에 기운 정책, 선언, 공약은 넘친다. ‘내 집’이 아니어도 잘 사는 삶을 향한 말은 가뭄에 콩 나듯 있다. 그마저 부정당한다. 거의 처음이랄 만한 주거 관련 실질적인 법제도인 ‘임대차 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은 시행 1년 반 만에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값 앞에 슬픔은 감춰져 있다.
값을 거두면 보이는 기쁨도 있다.
세입자, 아니 거주자는 7만원짜리 플루어 조명, 2인용 소파, 처음 짜본 책장, 길게 빠진 떡갈나무 테이블을 집에 들여놓는다. 마룻바닥과 창틀을 윤이 나게 닦는다. 원래 내 것은 아니지만 귀하게 여겨주니 내가 주인이라고 말한다. 내가 사는 곳이므로 ‘내 집’이라고 말한다. 집값을 궁리하며 살 곳을 정하는 대신 삶이 공간을 규정하도록 했다. 그렇게 만든 공간이므로 소유자보다 더 이 집을 사랑한다.
집값과 무관한 사람들, 세입자의 슬픔과 기쁨을 들었다. 값을 뺀 진짜 집의 의미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들을 둘러싼 제도의 역사를 나란히 본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설계된 세상의 규칙은 이내 낯설어진다. ‘임장’(부동산 매매를 위해 현장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은 살기 좋은 동네를 탐색하고 있을 뿐인 청년 임장꾼들의 사정도 들었다._편집자주
집에서 집값을 빼면 [사는집①]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등장인물은 가명으로 표기했다.
서울 북아현동 반지하 → 망원동 반지하 → 봉천동 반지하 → 신림동 공공임대
2020년 7월 임대차 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이 시행됐다. ‘민간’임대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였다. 모든 임대주택에 사는 세입자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법이 첫걸음을 뗐다. 두 번째 걸음은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세입자를 받을 때 전월세상한제는 적용되지 않는다. 안정성만큼이나 중요한 주택의 질을 통제할 방법은 없다.
임대차법은 지우(46)씨의 지금 셋집과는 관련 없는 얘기다. 서울 관악구의 공공임대아파트(50년 거주 가능)에 자리잡은 지 13년쯤 됐다. “혼자 산다고, 1인 가구라고 말해왔는데 고양이랑 같이 산다고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고양이가 가족이더라고요.” 처음 이 집에 오던 날 “대만족이었다”. 고양이가 볕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살았던 집들과 임대차법은 관련 있다. 그곳들은 민간임대, 그냥 셋집이다. 가장 오래 산 집은 망원동 반지하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집에 누런 가로등 불빛만은 내리꽂혔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개방감은 없는데, 여름이면 창문 바깥에서 집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종종 있었다. 안전하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대책 마련을 주문해봤자 미운털만 박힐 터였다. 실제로 미움받은 것 같다. “공공임대 예비 입주자 당첨되고 1년 정도 남아서, 1년만 연장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이런저런 요구를 해서 그런지 안 해주더라고요.” 고양이는 주방의 좁은 창문으로 기어 올라갔다. 사람처럼 볕이 간절한 모양이다. 그 볕을 공공임대에 가서야 구했다.
한국에서 공공임대와 민간임대 시장은 완전히 분리돼 있다. 이런 임대시장을 ‘이중구조’로 부른다. 질 좋은 공공임대와 통합된 시장에서 경쟁하며 민간임대의 질과 가격이 나아지는 일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기에 공공임대는 너무 적다. 민간임대 시장은 차라리 매매시장과 더 깊이 연결돼 있다.
전세금은 주택 매매의 지렛대 노릇을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의 주거 지원조차 이상한 결과를 낳는다. 정부의 대표적 주거 지원 사업이 된 전세대출은 매매가격과 임대료를 끌어올려 결국 세입자 처지를 난감하게 만든다. 월세 지원 역시 결국 나랏돈을 세입자를 통해 집주인에게 건네는 일과 비슷하다. 열악한 쪽방촌의 월 임대료가 기초생활보장 주거급여 수준(2021년 평균 월 25만원)에 맞춰 정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공과 민간의 임대가 이토록 완전히 분리된 상황이라면, 민간임대주택에 대한 안정성과 주거의 질을 법으로라도 통제하는 건 불가피하다. 그래야 주거 지원도 의미 있다. “임대주택시장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임차인 지원 확대와 함께 임대인의 기대 가격을 인하하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 수단을 함께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한만희·박준, ‘민간임대주택시장의 안정을 위한 정책 대안 분석: 국제비교를 중심으로’) 임대차 2법은 그런 의미다. 주거 지원의 토대다.
물론 공공임대라고 완벽한 셋집일 리 없다. 지우씨와 고양이에게 허락된 39㎡. 살다보니 좀 넓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긴다. 외진 데 지은 탓에 교통이 꽤 불편하다. 지하철역까지 30분은 걸리는 것 같다. 다만 어쩌겠는가. “이사할 수 있을까 하고 알아봤더니, 지금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민간임대는 너무 비싸고 열악해요. 여기가 최선이에요.” 만족하기로 한다. “아무튼 집주인이 정부니까요. 그래선지 관리도 어느 정도 잘되는 것 같고.” 집주인이 정부라는 말에 다소간 안도가 섞여든다.
전국 곳곳 원룸과 사택 → 서울 신림동 원룸
*민달팽이유니온, ‘2020 청년 주거 이슈발굴 보고서’를 참조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선혁씨가 던진 꿈으로 돌아온다. “어떻게, 어디서 살든 마음 편히”.
집에 얽힌 이 꿈은 ‘점유중립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원래 주택을 소유했든 임대로 살든 동일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인데, 의미를 넓혀 “어느 점유형태를 취하든 비슷한 정도의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태”(박미선 국토연구원 주거정책연구센터장, ‘청년주거정책: 불안한 대상과 혼란한 정책의 협주곡’)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점유중립이라는 개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
기석(23)씨는 고등학교 졸업 1년 전인 18살에 2년 동안 지냈던 보육원을 나왔다. 그때부터 혼자 산다. 따지고 보면 큰일은 아니다. 1년 뒤면 성인이 될 터였다. 성인의 자립을 별일로 여길 수는 없다. 그 뒤 5년 동안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뒀고, 비정규직으로 여러 일을 했고, 전국 곳곳 돌아다니며 살았다. 번 돈은 생활비, 무엇보다 월세로 나갔다. 돈이 모이지 않았다. 스물세 살에 모아둔 돈이 없다는 것, 또한 역시 별일은 아니다.
2022년은 그의 인생에 첫 정착이 시작될 법한 때다. 1월20일 기석씨는 지금 다니는 직장의 정규직이 된다. 기석씨가 서울에서 구한 첫 집은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50만원 하는 원룸이다. 되도록 보증금 낮은 곳을 찾았다. 그렇게 하면 월세가 늘었다. 월세 50만원이면 횡재했다고 생각한다. “마침 주변 대학이 비대면 강의 중이어서 엄청 싸게 구했어요. 지금이면 이렇게는 못 구해요.” 일에 안착하게 됐으나, 집에 정착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창을 열면 모텔 벽이 떡하니 나타나는 집이지만, 월세 50만원을 계속 부담해야 한다.
월세 지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건 물론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주거급여다. 1인 가구가 주거급여를 받으려면 한 달에 80만원 정도의 소득만 있어야 한다. 기석씨는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2021년에 쉰 날이 많기는 했는데 그래도 월 150만원꼴로 돈을 벌었다. 월세 50만원은 오롯이 기석씨가 마련해야 하는 돈이다. 보증금으로 쓸 종잣돈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더 들 것이다. 월세 부담을 지원해달라는 요구는 과도한가. 점유중립을 떠올리면 꼭 그렇지 않다.
민달팽이유니온이 2020년 12월 말 조사해보니, 내 집 마련을 위한 대표적 정부 지원인 디딤돌 대출을 2억원 받았다면, 시중은행과의 이자율 차이를 고려해 매달 19만2천원 정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셈이 됐다. 주택도시기금은 주택구입·전세자금 융자에만 2021년 10조7천억원을 배정했다. 같은 해 중앙정부의 주거급여(지원) 예산은 1조9800억원 규모다. 대출받을 수 있는 이는 어느 정도 돈을 모아둔 사람들이다. 당장 거주할 공간이 급한 기석씨가 내 집 마련이 가능한 계층만큼도 지원받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예산만 놓고 보면 정부는 시민의 꿈을, 거주보다 부동산 소유 쪽으로 몰아간다.
월세가 직접 지원되지 않는다면 좀더 저렴한 집이라도 필요하다. 기석씨는 필사적으로 공공임대주택을 찾아봤다. 유형별, 공급 주체별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공공임대주택의 유형과 특성을 줄줄이 꿴다. “보증금 1천만원이 넘는데 그런 돈은 없어요.” 보증금이 적고, 감당할 수 있는 공공임대를 마침내 찾았다. 대학생 기숙사형 임대주택이다. “그런데 거긴 대학생이 1순위, 졸업 뒤 2년 이내인 사람이 2순위, 저는 그냥 3순위예요.” 일단 넣어놓고 기다린다. 당첨 가능성은 크지 않다.
주거정책 앞 무소속 인간부모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받아 보증금을 감당할 수 있는 대학생에서 사회초년생으로, 신혼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의 고정관념이 주거정책에도 작동한다. 어른이 되어 자립해 일했고, 모아둔 돈은 없는 스물셋 평범한 기석씨는 주거정책 앞에 선 순간 돌연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 됐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서울은 세입자의 도시다 [사는집③]로 이어집니다.
집에서 집값을 빼면 [사는집①]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511.html
최선의 집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는집②]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512.html
서울은 세입자의 도시다 [사는집③]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5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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