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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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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돌보기 위해서는 지구가 필요해

지난 40년간 축소돼온 돌봄의 의미 다시 물어야, 돌봄이란 생명체가 지구 자체와 함께 살아남도록 조건을 제공하는 공동체적 능력
등록 2021-08-16 00:28 수정 2021-08-20 11:42
강원도 춘천시의 한 가정에서 재가요양보호사가 어르신을 돌보고 있다. 류우종 기자

강원도 춘천시의 한 가정에서 재가요양보호사가 어르신을 돌보고 있다. 류우종 기자

돌봄을 돌보기 위하여 연재 순서

① 상품화된 의료의 돌봄

② 돌봄은 젠더 이슈가 아니다

③ 돌봄의 의미를 다시 묻다

코로나19로 ‘돌봄’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노동’으로 조금씩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돌봄 위기’ ‘돌봄 공백’이 문제시되지만 돌봄은 여전히 특정 성별의 영역으로만 여겨진다. 정책도 산업적 차원에서만 논의된다. 협소한 관점에서 벗어나 ‘보건의료,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교육, 노동, 장애, 이주, 인종’ 등 다양한 열쇳말과 함께 돌봄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그 담론을 풍부하게 확장하는 연재를 기획한다. 잘 아플 수 있는 권리, 즉 ‘질병권’을 논의하고 사유하는 시민단체 ‘다른몸들’이 2021년 3월부터 5월까지 진행한 연속 강의를 기반으로 한다. _편집자

코로나19로 겪은 사회의 총체적 위기 상황이 앞으로 오랫동안 인류가 경험하게 될 기후위기와 감염병 위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체감하는 사람이 늘면서 돌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많은 시민에게 코로나19는 감염의 공포이기도 했지만,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 아이와 노인은 누가 돌볼 것인지, 당장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속출하는 환자는 누가 돌볼 것인지,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지와 같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돌봄의 위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돌봄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근본적인 사회전환을 해야 한다는 요구도 높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낮아진 출생률과 높아진 자살률이 보여주듯,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돌봄은 위기 상황이었다.

영국 돌봄 집단의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

돌봄 위기가 코로나19 이후 일시적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은, 돌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사회전환을 하기 위해서는 과연 돌봄이 무엇인가에 대한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케이트 소퍼가 탈성장 이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대안적인 쾌락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바로 돌봄이 가능한 시간, 돌봄이 가능한 관계맺음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돌봄이란 단지 특정한 형태의 서비스를 상품 형태로 공급하거나 공공서비스로 지원한다고 해서 충족되는 사회적 공백이 아님은 분명하다.

인간이 가진 근본적 필요의 차원에서 접근할 때 돌봄은 사회전환의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북반구에서 누리는 소비생활은 발생하는 비용과 해악의 상당 부분을 남반구에 전가하는 동안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서비스산업에서 이뤄지는 여성 이주나, 거주 국가의 소득수준을 따라 돌봄 노동자들이 연쇄적으로 이동하는 지구적 돌봄 연쇄 같은 사례들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 그러나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노동을 찾아내고 이 노동이 수행되는 방식에서 구체적인 연대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돌봄 논의가 꽤 진척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사회전환의 중심 원리로서 돌봄 논의가 이제 막 구체화하기 시작한 단계다. 어쩌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에 대해 2021년 8월 영국의 ‘돌봄 집단’(Care Collective)이 발간하고 최근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돌봄 선언>(Care Manifesto,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금 사회는 ‘돌봄의 부재’ 상태에 놓여 있으며, 돌봄을 중심에 두는 정치를 즉각 요구하고, 보편적인 돌봄을 요청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돌봄 없는 세계’다. 이는 날로 심해지는 기후위기와 세계적 불평등 속에서도 국가는 돌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국가 역할을 축소하고, 가족이나 친족들의 네트워크나 지역의 공동체 역시 돌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돌봄이 이뤄질 때도 이주민이나 난민 등 ‘우리’에 속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곤 한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2020년 5월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영국의 한 요양원에서 간병인이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REUTERS

2020년 5월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영국의 한 요양원에서 간병인이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REUTERS

돌봄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이런 공백을 메우는 것은 시장을 통해 주어지는 서비스인데, 가사노동이든 보육이든 간병이든 시장에서 구매한 서비스로는 돌봄의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외면하기 일쑤이다. 돌봄을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거나 비생산적 영역으로 여기는 관행을 단지 신자유주의 시대만의 현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지난 40여 년간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돌봄 축소가 전면적으로 진행된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돌봄의 언어와 실천 모두가 말살되는 과정에서, 돌볼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은 돌봄이 필요할 때 돌봄을 받을 가능성 역시 잃었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일어난 거대한 재난이었고, 돌봄 상실의 결과인 동시에 돌봄을 더욱 어렵게 하는 사건이었다.

돌봄이란 말에서 가사노동, 육아, 간병 등 특정한 노동에서 각 개인이 수행하는 행위를 떠올리기 쉽다. 이런 돌봄은 대개 핵가족이라는 가족제도에 대한 상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으며 이미 성별화된 경우도 많다. ‘돌봄 집단’의 저자들은 돌봄이란 말 그대로 돌볼 수 있는 사회적 능력과 행동이며, 생명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필수적인 영역이며, 이때 돌봄의 단위는 개인이 아님을 강조한다. 물론 돌봄은 가족 간 돌봄부터 요양원이나 병원, 보육시설, 학교에서 노동자가 수행하는 직접적인 돌봄, 필수노동자가 수행하는 매일의 서비스를 당연히 포함한다. 나아가 협동과 연대 경제를 조직하는 활동가들의 일, 주거권을 보장하고 화석연료 산업을 축소하며 녹색 공간을 확대하는 정책을 위해 일하는 활동 역시 포함됨을 이들은 강조한다.

“진정한 나는 고통에 흔들리지 않아”?

돌봄이란 대다수 사람과 지구상에 살아 있는 여러 생명체가 지구 자체와 함께 살아남아서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물질적이고 감정적인 조건을 제공하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나아가 돌봄이란 인간 개인 간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지구라는 행성의 차원까지 여러 차원에서 이뤄지는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의 가까운 이를 제대로 돌보기 위해서도 행성적 차원의 사고가 필요하고, 이런 복합적 돌봄의 인식에 기초한 좋은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돌봄의 개념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돌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돌봄에 대해 신자유주의가 미친 영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회적으로 돌봄의 영역이 축소됐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돌봄의 개념, 돌봄에 대한 상상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이 됐다는 사실이다. 기후위기 시대, 지구라는 행성의 안녕이 위태로워진 상황이고, 구조적 취약성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이 늘고 있음에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개념은 돌봄 가운데서도 자기돌봄의 개념이다. 코로나19가 발발한 이후 자기돌봄 프로그램은 더욱 부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감염병 위기 속에 우리 스스로를 지키려면 자기돌봄이 필요하고, 사회적 고립이나 불안 속에 자기를 돌보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실제 이뤄지는 자기돌봄의 논의를 가까이서 보자. 자아, 개인, 자율성, 선택, 치유 등이 강조되는 것이 미심쩍다. 실제 자기돌봄과 관련해 대중이 탐독하는 도서에는 “나의 눈물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가 나를 힘들게 할 때 자기돌봄을 기억하라” “진정한 나는 고통에 흔들리지 않아” 같은 구절이 등장하곤 한다. 물론 심리방역 프로그램, 온라인으로 떠나는 마음챙김 명상, 힐링여행이나 자기돌봄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긍정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자기돌봄 담론의 주 소비자는 돌봄노동자

그렇지만 코로나 시대의 건강이건, 아픈 사람을 돌보는 문제건, 기후위기 시대의 생태계를 돌보는 문제건 앞서 돌봄의 과제라고 이야기한 그 어떤 문제도 나 자신을 강조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문제의 해결에서 나 자신이 주체적인 태도를 갖는 것도 중요하고, 나 자신의 필요를 도외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돌봄이란 본질적으로 주고받는 것이고, 그 주고받는 것도 개인으로서의 너와 나 사이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로 존재하려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어떤 사회적 위계와 불평등을 극복해야 할 것인가 같은 문제를 성찰하고 분석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돌봄 논의에 많은 문제가 내재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 자리잡은 자기돌봄 담론의 주 소비자가 돌봄노동자 자신이라는 점이다. 인간으로서의 삶, 공동체의 생존, 인간이 문명세계라는 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돌봄노동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 돌보는 사람들은 나를 챙길 것은 나밖에 없다는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가고 있다. 이는 돌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예찬을 하는 것, 현재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서 돌봄만 예찬하는 것은 문제를 악화할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코로나19가 종식될 전망이 보이지 않고, 기후위기는 겨우 시작이라는 상황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백영경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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