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상품화된 의료의 돌봄
② 돌봄은 젠더 이슈가 아니다
③ 돌봄의 의미를 다시 묻다
④ 돌봄 노동의 이주화
⑤ 돌봄과 교육의 간극
⑥ 모두가 누군가를 돌보는 사회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코로나19 이후 돌봄이 부각되면서 더욱 강조된 말이다. 약자를 잘 돌보는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러나 이 말을 볼 때마다 서걱거리는 감정이 든다. 물론 이 말은 기본적으로 좋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그 너머가 아닐까?
‘무엇이 특정 존재를 약자로 만드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를테면 코로나19 유행 초기 마스크 대란 때, 코로나19에 가장 취약하다는 노인들은 마스크를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약국의 마스크 재고량 정보를 스마트폰 앱으로 제공하는 바람에,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노인은 길게 줄을 서고도 마스크를 구하지 못하고 일회용 마스크를 빨아서 써야 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특정 의존만을 유리하게 설정한 사회다. 젊은이들은 스마트폰 앱에 잘 의존하지만, 노인들은 이웃이나 사람에게 의존하며, 상대적으로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만 마스크 재고량을 배포하면서, 노인들은 졸지에 ‘마스크 취약계층’이 되었다.
혼자 거동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은 또 어떤가. 밀접접촉자라고 자가격리를 하라고 하면서 활동지원사를 배치하지 않았다. 입원한 중증환자에게는 생존을 위해 의료인을 ‘당연히’ 배치하면서 정작 중증장애인 자가격리에는 활동지원사 배치가 필수라는 점이 간과됐다. 중증장애인 중에는 직장 생활을 하거나 대학을 다니는 이들도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무능력자’이자 ‘약자’가 되면서, 일부에서는 ‘그러니까 장애인끼리 시설에 모여 사는 게 그들을 위해 더 좋다’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 사례를 좀더 부연하자면, 휠체어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로 약자가 되는 게 아니라,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없음으로 인해 약자가 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코로나19 내내 워킹맘의 고충도 곳곳에서 보도됐다. 코로나19 초기 워킹맘들은 등교하지 않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동동거리거나, 재택근무와 아이 돌봄을 동시에 하며 숨 쉴 틈 없는 노동을 경험했다. 워킹맘을 위해 돌봄교실 등 사회적 돌봄을 강화해야 한다거나, ‘일·가정 양립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반복됐다. 워킹맘은 이처럼 상당한 고통, 심지어 과로사를 경험하는 계층인데도 ‘사회적 약자’라는 인식조차 미미하다.
2020년 11월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발행한 기혼 유자녀를 대상으로 한 ‘COVID-19와 한국의 아동 돌봄조사’ 보고서를 보면, 워킹맘의 경우 코로나19 이전에는 하루에 5시간 정도 자녀를 돌보던 것에서 6시간47분으로 자녀돌봄 시간이 크게 늘었다. 전업주부의 자녀돌봄 시간은 9시간에서 12시간38분으로 증가했다. 반면 남성의 자녀돌봄 시간은 코로나19 이전보다 증가하기는 했으나 맞벌이 남성은 3시간에서 3시간54분, 홑벌이 남성은 3시간30분으로 30분 정도 늘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3.5배 가사노동물론 이런 돌봄의 비민주성은 코로나19 상황에서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맞벌이 부부 비율이 공식 통계로 잡히는 것만 46%이고, 맞벌이 가구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남성이 54분, 여성은 187분으로 여성이 3.5배가량 더 일한다(2019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남성의 가사노동 참여율이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한다. 또 최근 인구복지협회의 ‘코로나19와 워킹맘의 양육 실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우울척도(CES-D) 검사 결과 워킹맘 45.3%가 ‘우울 의심’으로 나타났다.
짐작하건대 워킹맘의 ‘우울 의심’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제법 심각했을 듯하다. 앞의 한국노동연구원 통계에서 보듯, 워킹맘은 평균적으로 하루 5시간을 자녀돌봄에 사용한다. 그렇다면 임노동을 포함해 평일에만 주당 60시간, 주말까지 합치면 최소 주당 70∼80시간을 노동한다는 의미다. 주당 54시간 이상 노동을 과로라고 하면, 워킹맘은 극심한 과로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따금 신문에 등장하는 ‘워킹맘 과로사’가 특별한 게 아니라, 한국의 워킹맘이 과로사하지 않는 게 특이할 지경이다.
워킹맘의 고통과 우울, 심지어 과로사로 이어지는 현실은 워킹맘이 본래적 약자라는 의미일까? 자본주의 사회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전제로 발전해왔다. 노동자가 퇴근하면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누군가에 의해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고, 청소와 세탁이 되어 있으며,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신선하게 충전된 노동력으로 출근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는 상당수 노동자가 맞벌이거나 1인 가구다. 퇴근 이후 집에서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돌봐줌으로써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시스템이 지금 사회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아서 남성들은 성찰 없이 관습적으로 여성에게 가사노동(돌봄노동)을 맡기고, 워킹맘들은 과로사 직전까지 몰리고, 1인 가구는 돌봄 취약계층이 됐다.
감염병 시대, 돌봄이 곧 안전이고 방역이 된 지금이야말로 이 시스템을 전환할 시기다. 낸시 프레이저가 고안한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델은 모든 노동자는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을 가정한다.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임노동은 하지만 가사노동은 하지 않는 남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면,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은 임노동도 하고 가사노동도 하는 여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모든 시민은 누군가를 돌본다는 전제로 노동시장과 도시가 설계되는 것이다.
그 돌봄의 대상은 어린 자녀나 연로한 부모일 수 있고, 아픈 가족일 수 있다. 또 종일 일하느라 지친 맞벌이 부부가 서로를 돌보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곧 가장 많은 가구수가 되리라 전망하는 1인 가구일 경우 집안일하고 이웃 시민과 돌봄을 나누는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기 돌봄의 시간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의 많은 노동자는 아플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인 만큼, 자기 돌봄 시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OECD에서 두 번째로 긴 노동시간, 고도의 경쟁, 통계만으로 다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산재, 과로사가 만연한 사회는 출퇴근이 사선을 오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직장 생활을 오래 할수록 아플 수밖에 없다는 직장인들의 자조적인 말은 과장이 아니다. 오염된 생태계와 라돈 침대나 가습기 살균제처럼 일상적으로 관리되지 않는 위험 물질은 예외 없이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임을 입증한다. 우리 모두는 만성질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인 만큼 적당한 운동을 하고, 신선한 음식을 챙겨 먹고, 가정용 마사지기로 종일 일하느라 숙이고 있던 목을 마사지하고, 퉁퉁 부은 다리에 임시 패치라도 붙여서 부기를 빼는 일들이 필요하다.
워킹맘이나 1인 가구가 더는 약자가 아닌 사회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을 중심으로 노동시장과 사회가 재구성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퇴근 후 돌봄노동을 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이 단축될 것이고, 육아휴직제나 아픈 가족 돌봄 휴직제가 성별과 상관없이 보편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워킹맘 과로사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 워킹맘이나 1인 가구가 더는 (돌봄) 약자가 아닌 사회가 될 것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실현될 것이며, 돌봄 시간과 제도가 보장되는 만큼 출생률이 증가할 가능성도 커진다. 요양원은 도시 외곽뿐 아니라 도심 곳곳에도 존재할 것이고, 퇴근길에 요양원에 모신 연로한 부모님을 만나서 30분 정도 대화하며 돌봄의 눈빛을 더 자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바이러스와 공진화하는 길은, 많은 이를 약자로 만드는 낡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을 벗어나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로 진화해가는 것이다.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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