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상품화된 의료의 돌봄
② 돌봄은 젠더 이슈가 아니다
모든 이론은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반대로 알려지는 경우도 심심찮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처럼 변화를 지향하는 사상일수록 왜곡이 흔하고 그 왜곡에 맞서는 또 다른 확증편향도 심하다.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상사다.
‘보살핌 윤리’(Care Ethics·돌봄노동, 이하 혼용 표기)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억울한’ 사상이다. 여성주의자 사이에서도 논란과 무지(Ignore)는 물론이고 분노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한마디로, 남성 문화는 이 이슈에 무관심하고 여성들은 싫어한다.
가장 극단적인 성별 분업 영역남성 문화는 돌봄을 하찮게 여기거나 ‘모성처럼’ 생물학적 본능으로 생각한다. 반면 여성에게는 노동시장 경력부터 자아 형성까지 전 생애에 걸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삶의 근본적인 고민이다. 이처럼 돌봄노동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젠더 문제라는 인식에서 온다. 현실적으로도 돌봄노동은 가장 극단적인 성별 분업 영역이다.
그러나 돌봄의 가치와 성별 제도는 분리돼야 한다.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타인을 돌보는 일상은 인간의 조건이다. 이제까지 이 노동을 무시해도, 논의하지 않아도 사회는 굴러갔다. 남성 문화는 개인이 의식하든 안 하든, 돌봄노동의 독특한 착취적 성격-자연스러움-을 잘 알고 있다. 계급이 낮은 남성도 이 노동을 강요받거나 일상적으로 의식하며 사는 이는 드물다. 평생 반찬거리를 걱정하고 통돌이 세탁기의 때를 제거하기 위한 세제를 따로 사고 처가의 심기를 염려하는 남성은 ‘없다’. 저출산 대책을 타령하는 국가는 실상, 아이가 저절로 큰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구절벽, 노동력 부족, 지방 소멸을 걱정하기 전에 모든 남성에게 2년 이상 ‘독박 육아’를 제도화해야 한다. 대신(?) 그 말 많은 군대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징병하면 된다.
이와 관련, 몇 년 전 경험했던 어느 유명 남성의 연설을 잊을 수 없다. 그의 요지는 가사노동이 쉽다는 것이다. “제가 이번 명절에는 두 손을 걷고 음식 준비를 했어요. 여자들은 쉬라고. 비빔밥을 만들었는데 굉장히 간단하더라고요. 일단 양푼을 준비하고 거기에 새우깡, 양파깡, 감자깡 넣고 섞으면 됩니다.” 청중은 대다수가 여성이었고 조용했다. 나는 이 말이 조롱인지 자랑인지, 썰렁한 농담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런 발상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분석이 요구될 뿐이다.
돌봄의 영어, 케어(Care)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중에서 ‘I don’t care’(관심 없어, 신경 쓰기 싫어)의 사례가 가장 문맥에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케어는 ‘나’ 외부(자연, 타인…)의 세계에 관심 갖고 염려하고 마음을 쓰는 일이다. 일상생활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 어감이든,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해?”라고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돌봄의 본질은 관계와 연결이다. 연결되지 않고 생명체는 생존 불가능하다.
대개 돌봄노동이 가정에서만 이뤄진다고 생각하지만, 돌봄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공사 영역 할 것 없이 상호 존중과 협력이 없는 사회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같은 정당, 즉 입장이 다른 집단일수록 협력이 필수적이다. ‘약자’는 종(種) 전체의 필연적인 일부이지, 약육강식이나 승패의 결과가 아니다. 생명체의 생로병사 전 과정에 돌봄이 필요하다.
돌봄 사상은 독립이냐 의존이냐, 경쟁이냐 보살핌이냐, 규범이냐 맥락이냐, 선천적(Nature)이냐 후천적(Nurture)이냐 등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이 대립쌍은 반대말도 아니고 동등하지도 않다.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거나 ‘독립’과 ‘의존’처럼 위계화한다. 이러한 이분법(二分法)과 이원론(二元論)으로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떤 현실도 한 가지 성질만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천성과 후천성은 혼재한다. 그것이 문화(Culture)다. 문화는 다시 자연과 양육의 경계를 정하고, 이 과정은 순환과 진화를 거듭한다.
보살핌 윤리학은 수천 년간 특정 범주의 인간(여성, 노예…)이 종사해온 노동을 성역할로 합리화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성역할은 강제된 사회규범이지 인간 본성이 아니다. 보살핌 이론가들은 여성의 성역할 노동을 혐오하든 숭배하든 타자화하지 않고, 돌봄노동의 성격 그 자체에 주목한다. 다만 여성들이 이 노동을 오래 해왔으므로, 이를 이론화하는 데 (남성보다) 유리한 위치(Positions)에 있다. 노동은 언어를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즉, 보살핌 윤리는 돌봄노동이 가치 있는 일이므로 여성이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혀 아니다.
인종 역할, 계급 역할이란 말은 없다. 그러나 ‘성역할’(Gender Role)이 자연스러운 현실은 성차별의 긴 역사와 편견을 말해준다. 흑인이 특정 시기에 목화농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모든 흑인이 평생 그 일에만 종사해야 하는가. 안 하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가. 그 일이 그들이 태어난 이유이고 역할인가. 여성이 해왔던 일, 여성의 지위, 그 노동의 성격. 이 세 가지는 별개의 문제다. 보살핌은 젠더 이슈가 아니라 남녀 모두 수행해야 할 노동, 각자 자기 삶의 방도다. 당대 40% 넘는 1인 가구, 인구증가율 0% 이하 저출산은 보살핌노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에 남녀 모두가 적응한 현상이다. 혁명은 일어났고, 지나갔다.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실현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경찰, 의사, 판사, 교원(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환경미화원, 택시기사, 관광업 종사자, 특히 공무원(Civil Servant, 시민의 종) 등 현대사회 직업에서 타인을 보살피지 않는 노동은 거의 없다. 모두 대인 서비스다. 그런데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 지원사의 급여나 사회적 지위는 노동강도와 잦은 초과노동에 비해 매우 낮다. 의사도 환경미화원도 돌봄노동자지만 이들의 지위는 같지 않다. 의사가 청소원보다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살핌노동자의 차이는 대상의 차이다.
의사의 권력은 환자의 고통에서 나온다. 택시기사나 주민센터 공무원은 ‘보통 사람’들과 일한다. 법조계 종사자는 보통 사람이되, 상황이 다급한 이들을 상대한다. 이처럼 누구나 보살핌노동을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가와 그들의 상황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다. 즉 대상과의 관계에서 보살핌노동자의 지위가 결정된다.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상대의 필요와 요구에 집중하고, 그의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 인공지능과 무인운전도 이 점을 보완해야 상품화, 상용화가 가능하다.
현재, 여성이 하는 돌봄노동은 대개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되고, 계량화하기 힘들며, 무임금에다 사회적 가치가 낮다. 낮은 정도가 아니라 여성이 그 일을 하는 순간,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거나 성원권을 잃게 된다. 직장에서 사용하는 가장 모욕적인 말이 “집에 가서 애나 봐라”다. “전업주부는 노는 사람, 육아노동자는 맘충”이라는 인식은 말할 것도 없다. 간호사나 사회복지사처럼 ‘직접적인’ 보살핌이 요구되는 직종은 제도화된 모성성과 비슷한 무한정 서비스의 원리가 강하게 요구된다.
1980년대 초반부터 서구의 여성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 문제제기했다. 여성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돌봄노동은 무관하다. 여성적 가치? 그렇다면 흑인적 가치, 장애인적 가치도 있는가?
캐럴 길리건, 사라 러딕 등 보살핌 윤리를 제기한 초창기 이론가들은 책 첫 페이지에 단언한다. “돌봄은 젠더 이슈가 아니다.”(This is not a gender issue.) 돌봄의 가치는 남녀 중 누가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공적 영역의 작동 원리는 경쟁, 계약, 합리성 등 획일적이다. 보살핌 윤리학은 이에 돌봄도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다른 목소리’다. 경쟁 위주 사회를 당장 돌봄의 사회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보살핌 윤리는 공적 영역에서 통용되는 가치의 다양화를 주장한다.
삶이 전쟁 같고 집은 휴식의 공간이고 경쟁은 필연적이고 승자독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통념은 통념, 지배 규범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런 상태로는 지구와 인류의 생존은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 기후위기 시대, 돌봄은 피할 수 없는 가치가 됐다. 남성 국가, 문화, 시민사회가 돌봄 윤리를 사유하고 공적 영역의 의제로 삼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 ‘동시’ 멸망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이별의 시간차를 줄이는 것이 그나마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학기술 발달로 기후위기도 건강 약자, 노인, 동물에게 선택적으로 작용, 더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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