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상품화된 의료의 돌봄
② 돌봄은 젠더 이슈가 아니다
③ 돌봄의 의미를 다시 묻다
④ 돌봄 노동의 이주화
⑤ 돌봄과 교육의 간극
“쩨쩨하게 선생질이나 하는 사내한테….” 우리 할머니는 이런 일성으로 딸에게 들어온 선 자리를 내치셨다. 엄마가 쌀집 막내아들이 아니라 선생 하던 사람과 결혼했으면 사모님 소리 듣고 노후 걱정 없이 살았을 텐데, 나중에 할머니의 손녀들은 모여 앉아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시대에 선생이란 직업은 ‘가난’과 ‘이사’를 상징했고, 할머니는 사윗감 후보가 선생이란 말에 직업이 군인이던 남편을 떠올렸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는 남자가 ‘선생질이나’ 하는 건 좀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특히 더 그랬다. 그래서 교직은 여성들에게 그나마 취업문을 열어준 것이기도 했다. 애들 ‘코나 닦아주면서’ 기역 니은 덧셈 뺄셈 가르치는 일은 ‘남자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돌봄이 수반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여교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공교육 체계가 만들어지던 19세기 후반, 보통교육이 확장되면서 ‘사회의 보모’ 역할을 해줄 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여성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확장했다.
남자는 ‘코흘리개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작은 틈새에서 차별적 처우와 임금을 감내하며, 여자에게 제한적으로 허용된 소수의 직업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조차 여성은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도 있는’ 존재임을 의지와 능력으로 끊임없이 입증해내야 했다.
교직은 여성이 임신·출산·육아를 하면서도 병행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직종 중 하나로, 여성 비율이 높은 직종이 됐다. 그런데 고용불안 시대에 교사가 선망 직종이 되자, 이제는 교직에 여자가 너무 많아 문제라고 한다. 교육자의 성비 불균형은 그 자체로 피교육자의 불균형 교육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교육자가 대학교수일 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유치원-초중등-고등으로 이어지는 교육과정에서 교육의 노동가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건 노동에 섞인 돌봄 비율이다.
돌봄과 교육 사이에는 오래된 위계와 불평등이 존재한다. 가장 오래되고 끈질긴 것은 가부장적 차별과 성별 역할 분리에 따른 젠더 불평등이다. 돌봄은 ‘애나 키우는’ 일이고, 교육은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며, 그래서 돌봄은 여자의 일이고 집안의 일이며, 교육은 남자의 일이고 국가의 일이라는 구분이다. 근대 이후 공사 구분에 따른 일터와 삶터의 분리, 학교와 가정의 분리는 교육과 돌봄의 분리와 차별을 더욱 강화했다.
일·가정 분리 정책은 임금노동 체제 밖에서 상품 생산이 아니라 삶을 생산하는 노동, 생산을 생산하는 모든 재생산 노동을 외부화하고 비가시화했다. 노동자는 출근에서 퇴근까지 생산라인에 서 있는 시간에 대해서만 노동시간을 인정받았다. 식사, 청소, 빨래, 휴식 등 삶과 노동의 재생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노동은 ‘사적 영역’인 집 안으로 전가됐다. 임금노동 체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전가된 돌봄 노동에 의해서만 지탱됐다. 기업이 필요한 노동자를 생산하고 돌보는 노동을 가내의 무상노동으로 전가한 것처럼, 국가는 학교에서 돌봄을 분리하고 외부화했다.
마치 매일 수세식 변기를 쓰면서도 버튼만 내리면 깨끗한 물이 콸콸 흘러나와 배변을 처리해준 뒤에는 그 물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기업은 아침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콸콸 쏟아져 들어와서 저녁이 되면 지친 몸으로 어디론가 흘러나가는 노동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재생되는지 묻지 않았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들은 아침마다 말간 얼굴로 학교에 쏟아져 들어왔고, 일과가 끝나고 지친 얼굴로 돌려보내면 그들은 어딘가에서 먹고 자고 쉬고 난 뒤 다음날 아침 학교에 온다. 교문 밖은 학교의 구역이 아닌 것처럼, 교육은 등교와 하교 사이의 활동으로 국한됐다. 그동안 노동자든 아이든 어딘가로 내보내기만 하면 다시 살아 돌아오는 마법 같은 일은 누가 담당하고 있었을까? 이렇게 돌봄 노동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전가하고 무상으로 착취하면서 기업은 성장하고 국가는 발전했다. 눈부신 성장의 마술은 그림자 속에서 일어났다.
사랑, 희생, 헌신 등으로 불렸던 이 그림자 노동이 공적 의제로 가시화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서구에서는 전후의 계급 타협과 복지국가 시스템에 의해 본격적으로 돌봄이 국가적 책무가 됐다. 반면 한국에서는 돌봄의 사회화가 국가적 복지라는 형식을 제대로 갖출 틈도 없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적으로 ‘시장화’하는 방식에 따라 급속도로 전개됐다.
한국에서 돌봄의 사회화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요구하며 쟁취해낸 성취와 타협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금융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고용불안, 해고와 실업의 공포, 가계의 실질소득 감소분에 대처하기 위한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과 관련이 있었다.
가족과 이웃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이번에는 돌봄이 집 안에서 집 밖으로 외부화됐다. 제일 먼저 외부화된 것은 노인과 아이다. ‘집 밖’의 안전한 공동체와 상호부조 관계가 다 와해되면서 동시에 돌봄이 시장에 개방되자 필요한 건 관계가 아니라 돈이었다. 그때 집 안의 여성을 불러낸 건 여성해방의 나팔소리가 아니라 저렴한 노동을 낚아채려는 자본의 덫이었다. 집 안의 돌봄은 무가치했지만 시장의 돌봄은 가치를 생산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저렴한 가치였다. 어린이집, 방과후 학원, 노인요양시설 등 영리적 상업기관에 의해 돌봄 서비스가 제공되자, 이 서비스를 사기 위해 저렴한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여기에 고용된 저렴한 여성노동이 다시 저렴한 돌봄을 떠맡았다. 돌봄은 서로의 노동을 파먹는 갱도가 됐다. 그 시기 돌봄은 학교로도 떠밀려 들어왔다.
2004년 맞벌이와 저소득층 가정 자녀의 양육 부담을 덜어준다는 취지로 돌봄학교(이후 ‘돌봄교실’로 이름 변경)가 처음 도입됐다. 인력도 프로그램도 제도도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입된 돌봄학교는 졸속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부모들이 밤늦게까지도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야간 돌봄교실 확대 정책을 발표하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곧 학교에 입학할 미취학 자녀를 둔 경력단절여성인 나에게, 그건 암울한 이야기지 희망적인 소식이 아니었다. 나는 그 소리가 ‘밤 10시, 12시까지 어린이를 안전하게 보관해드립니다’라는 수하물보관소 확대 정책처럼 들렸다. 그건 기업 지원책이지 노동자 지원책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정책 실시 뒤에도 실제 도입한 학교는 많지 않았다. 학교는 굳이 지금까지 안 하던 귀찮은 업무를 회피하고 싶었고, 부모들은 보관소에 짐을 맡기듯이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임시적 대체재가 아니라 시장적 돌봄을 공공화하는 궁극적 대안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었다. 교사에게도,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그리고 그들 모두인 노동자에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기업가와 정치인, 교육 당국은 한 노동자의 야간노동을 위해 다른 돌봄 노동자의 야간노동이 소모돼야 하는 무한 악순환을 고려하지 않았다. 세계화 이후 본격화된 금융자본주의와 전자거래 시스템 위에서 24시간 돌아가는 가속 경제는 시간을 채굴하면서 성장했다. 재생산과 돌봄을 위한 시간도 그 속에 빨려 들어갔다. 사실 가장 필요한 것은 부담을 떠넘길 곳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돌보고 세계를 돌아보며 살 수 있는 모두의 시간이었다. 국가는 시민의 시간과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가는 자본과 시장의 무제한적 자유를 강제하고, 시민은 정부에 그것을 요구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돌봄 정책은 수건돌리기처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다른 곳으로 문제를 이전하는 방식으로 추진됐고 이는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의 교육과 돌봄 정책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최근 학교 돌봄 관리 주체를 지방자치단체로 이전하는 것도 똑같은 방식이다. 문제를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전가하는 방식. 어차피 돌봄교실이 수하물보관소 같은 곳이라면 교육청이 운영하건 지자체가 운영하건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지자체 이전이 민간위탁이란 방식으로 돌봄을 민영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추구하는 공기업과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의 목표가 다르고 그에 따라 운영 원리가 다를 수밖에 없다. 민간위탁형 모델에는 ‘이윤’이라는 사적 동기가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그건 수하물보관소의 서비스 질과 노동조건을 더욱 나쁘게 만들 것이다.
요즘은 문제의 원인에 대응하지 않으면서 우회만 시키는 ‘대체’와 ‘교체’의 전략이 어디서나 유행이다.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연료와 기술만 ‘교체’해서 탄소배출을 줄이고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하는 그린뉴딜식 녹색성장론은 대표적으로 정치적 전환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기술적 교체의 사유 방식이다. 이런 교체 대안은 종종 더 위험한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청정에너지’로 개발된 핵발전 기술이 그랬던 것처럼. 학교 돌봄을 지자체의 민간위탁으로 이전하는 것 또한 한쪽의 문제를 또다시 ‘다른 쪽의 문제’로 전가하는 수건돌리기식 대체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돌봄 없이는 교육도 없다교육과 돌봄 간의 위계와 불평등은 성별 노동분업에 따른 불평등, 공사 영역의 분리에 따른 불평등, 그리고 노동시장에서의 상품화와 계급양극화에 따른 노동가치의 불평등과 모두 연결돼 있다. 학교 돌봄 문제도 ‘교육청이냐 지자체냐, 학교 안이냐 밖이냐’라는 구도에서만 보면 돌봄이 근본적으로 노동·빈곤·불평등 문제와 직결된 것임을 놓친다. 이것을 돌봄노동자와 교육노동자의 이해관계 대립 구도로 만들어가는 건 지배자가 피지배자들끼리 싸움을 붙여 단결을 막고 을대을의 싸움으로 만드는 분리통치의 수법이다. 다른 위기와 마찬가지로 돌봄 위기에서 가장 먼저 고통당하고 희생되는 주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교사와 돌봄노동자와 당사자인 어린이들, 그리고 부모이기도 하고 노동자이기도 한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고통은 ‘시간의 착취’다. 진짜 필요한 건 내 앞으로 온 부담을 떠넘길 다른 희생자가 아니라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 우리는 나를 돌보고 타인을 돌보고 세계를 돌아보며 살 수 있는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돌봄이 최우선이다. 돌봄 없이는 교육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명도 없고 지구도 없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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