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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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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화된 의료에 돌봄은 없다

‘병원-의료’ ‘장기요양-돌봄’이라는 이분법으로
기술 의존도, 상품화 가속… ‘돌봄의 의료’로 변화해야
등록 2021-07-04 11:46 수정 2021-07-05 01:45
한국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협회 등 노인요양 관련 단체 회원들이 2014년 4월27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장기요양 급여수가 개정안에 반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협회 등 노인요양 관련 단체 회원들이 2014년 4월27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장기요양 급여수가 개정안에 반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로 ‘돌봄’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노동’으로 조금씩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돌봄 위기’ ‘돌봄 공백’이 문제시되지만 돌봄은 여전히 특정 성별의 영역으로만 여겨진다. 정책도 산업적 차원에서만 논의된다. 협소한 관점에서 벗어나 ‘보건의료,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교육, 노동, 장애, 이주, 인종’ 등 다양한 열쇳말과 함께 돌봄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그 담론을 풍부하게 확장하는 연재를 기획한다. 잘 아플 수 있는 권리, 즉 ‘질병권’을 논의하고 사유하는 시민단체 ‘다른몸들’이 2021년 3월부터 5월까지 진행한 연속 강의를 기반으로 한다. _편집자

글을 쓰기로 약속한 며칠 뒤부터 갑자기 환자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됐다. 얼마나 더 할지 모르나 지금까지 잠깐 하는 그 노릇도 마음이 퍽 불편하다. 환자도 환자지만, 치료진과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답답하고 불안하다. 왜 그런 검사를 하는지, 검사 결과가 무슨 뜻인지, 앞으로 어떤 일을 겪는지, 모르는 것투성이니 그럴 수밖에. 다들 하도 바빠 이야기 들을 틈이 없고 말할 기회도 얻기 어렵다.

보호자가 이런데 환자는 오죽할까, 그게 큰 걱정이다. 환자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데 치료진은 “검사해봐야 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나도 짧게나마 의학을 배운 적이 있으니 그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사이 환자는 온갖 걱정에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식사를 줄였다. 치료진이 진단과 치료 방침을 찾느라 골몰하는 동안, 환자의 몸과 마음에 병을 보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봄’은 턱없이 모자란다.

의료·돌봄의 분리가 초래한 것

의료(치료, 진료도 같다)의 ‘료’와 요양의 ‘요’는 같은 한자(療)를 쓴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돌봄’이고 외국말로 ‘케어’라고 한다. 영어를 비롯해 많은 외국말로도 비슷할 터, 의료는 돌봄과 떨어질 수 없다. 병을 앓고 치료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왜 그렇지 않을까. 모든 치료가 곧 돌봄이니, 간병-간호-의료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바로 돌보는 행위다.

간병-간호-의료 속에 담긴 돌봄은 같으면서 또 다르다. 분야별로 기술이나 지식이 다를 수 있지만, 예를 들어 환자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것, 걱정을 덜고 따듯한 말을 건네는 일, 환자 스스로 할 일을 알려주고 잘하게 하는 노동은 공통의 돌봄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의료와 돌봄은 경계가 명확하다.

나는 지금처럼 의료와 돌봄이 분리된 결정적 계기가 2008년 7월 시작한 ‘노인장기요양보험’이라고 생각한다. 주로 노인의 일상생활 지원과 수발 부담을 사회적으로 나눌 목적으로 만든 제도인데, 의료비 부담을 책임지는 국민건강보험과 짝을 맞춰 장기요양에 드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 취지였다.

문제는 두 제도가 주로 보장하는 급여(서비스)를 의료와 돌봄으로 나누고 재정이 둘 사이를 넘나들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다. 제도가 현실을 재규정했다고 할까. 질병 치료는 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국민건강보험으로, 일생생활 보조나 수발은 요양원(요양시설)과 주간 보호시설, 재가요양 등을 장기요양보험이 맡도록 나눈 것이다.

제도는 사람들의 삶에 직접 개입해 지식과 개념을 새로 만들고 또 바꾼다. 이제 돌봄은 장기요양에서만 다루는 것처럼 되고, 치료와 의료는 (돌봄이나 요양과 달리) 전문 지식과 기술, 시설, 장비를 활용해 전문가가 하는 행위로 굳어지게 된다. 치료 현장에는 돌봄·요양·수발이 큰 비중으로 남았으나 사회적으로 병원-의료, 장기요양-돌봄이라는 이분법이 통하게 된 셈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후 의료는 돌봄과는 다른 어떤 것, 돌봄의 특성은 약하거나 없는 것처럼 바뀐다. 사회적 이해, 즉 중요성, 가치, 의미 부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료에서 돌봄은 기껏해야 비전문가가 담당하는 간병 정도로 좁아지고 의료의 본령은 전문가가 담당하는 전문적 지식, 기술, 시술, 검사 등으로 규정된다. 병원과 의사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가족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 제도의 힘이고 그런 이분법이 미친 영향이다.

2019년 3월1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EU 게이트웨이 헬스케어·의료 기술 전시상담회’에서 한국 기업 관계자들이 참가업체 담당자와 상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3월1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EU 게이트웨이 헬스케어·의료 기술 전시상담회’에서 한국 기업 관계자들이 참가업체 담당자와 상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탈돌봄’ 가속화로 기술 의존 심화

장기요양보험 이전부터 의료는 좁은 의미의 의학 또는 의학적 진단과 치료 영역으로 축소되는 추세였다. 현대의료가 돌봄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전문 지식과 기술에 의존하게 된 이유가 클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이나 컴퓨터단층촬영(CT), 초음파, 로봇, 혁신 항암제 같은 기술 없이 현대의료를 상상할 수 있을까. 조금만 이상해도 소문난 큰 병원을 찾는 데는 더 발달한 ‘첨단’과 ‘선진’ 과학기술이 있다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기술 일변도의 의료가 되면 나머지 비기술적 요소는 당연히 위축된다. 과거에 진료의 핵심 요소라 했던 원활한 의사소통, 공감과 위로, 상담과 교육까지, 말하자면 돌봄은 밀려나 주변적이고 부수적이기 십상이다. 의사를 비롯한 진료진은 말할 것도 없고 환자와 보호자도 병원이라면 으레 ‘탈돌봄’의 기술 위주 의료를 기대하게 됐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의료는 그 결과다. 몇 해 전 보호자 자격으로 한 대형병원 응급실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 환자가 본래 문제 말고 새로 배가 불편하다고 호소하니까 담당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복부 초음파도 찍어드릴까요?” 자세한 질문도 기초 진찰도 하지 않은 채, 의사는 이것이 환자의 이해와 기대에 가장 잘 부응할 방법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의료진과 환자 어느 쪽에서 시작한 것인지 모르나, 우리는 이런 의료와 돌봄 ‘구조’ 속에 살아간다.

현재의 의료-돌봄 체계와 의학-의료 기술은 서로 힘을 보태는 관계, 즉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는 관계에 있다. 한국의 제도적 의료와 돌봄은 시장 원리로 움직이고, 의학과 의료 기술은 그 시장에서 상품화해 수익의 원천이 되기에 적격이다. 의료에서도 좁은 의미의 돌봄에 해당하는 것은 대체로 가격(수가)을 매기기 힘들고 환자가 가치를 인정하기도 어렵다. 좋은 환자 상담과 모든 암을 찾아낸다는 ‘첨단’ 양전자단층촬영(PET-CT)을 비교해보라. 환자가 어느 쪽이 더 가치 있고 진료비를 낼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어떤 의료를 택할지. 또한 이를 아는 병원과 의료진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병원도 국민건강보험도 이런 경제 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의료의 상품화나 영리화 경향이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 몇 군데 병원의 문제가 아닌 체제에서 연유한다고 하는 이유다. 하루 이틀 된 특성이 아니라 오랜 기간 묵은, 말하자면 역사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의료체계가 민간 의료기관 위주로, 수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시장 원리로 운영되는 한, (좁은 의미의) 의료와 돌봄 모두 일반적인 상품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수익 안 되는 돌봄, 방치되거나 전가되거나

국민건강보험이라는 틀이 이미 비시장적 공공이라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건강보험이 가격(수가)을 규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한된 시장’도 시장이긴 마찬가지다. 매출과 수익이 관건이면 의사든 병원이든 건강보험에서 진료비를 지급하는 항목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돌봄도 돌봄 제공자가 수익과 경영 논리를 떠나지 못하는 한,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의 수가와 진료비가 생존과 소멸을 결정한다.

돌봄은 시장 원리에서 불리하다. 간호사 수가 충분해야 좋은 돌봄이 가능하지만, 건강보험에서 나오는 돈과 무관하면 병원이 적자를 본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수가 항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환자가 가치 높다고 생각하는 의료가 무엇인지, 수익과 경영에는 어느 쪽이 유리한지, 한시도 이해관계가 사라지지 않는다. 의료는 점점 더 탈돌봄 쪽으로 치우치고, 수익이 되지 않는 돌봄은 방치되거나 환자에게 전가된다.

지금 추세와 그 바탕의 동력이 바뀌지 않으면, 나는 돌봄이 살아나거나 제 가치를 회복하는 의료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로 의료기관 안에서 행해지는 의료와 돌봄은 점점 더 기술에 의존하고 더욱 상품에 가까워지며 그럴수록 시장 논리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상품이 되기 어려운 돌봄은 더 축소되고 주변화하며 개인화할 것이다. 성별과 계급을 비롯한 불평등 구조도 온전하게 지속하리라.

그러나 어떤 구조라도 모순 관계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돌봄 없는 의료라는 문제와 고통이 마냥 지속한다고 비관하기도 이르다. 나는 조만간 적어도 두 가지 기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나는 인구 고령화와 의료 변화의 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인구 감소 지역에서 ‘의료시장’도 동시에 소멸하는 사태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 건강과 질병, 이에 대한 의료 특성이 크게 변화한다. 어쩌면 이미 상식이 된 것, 만성질환이 중심이 되고 과거의 병원과 의료 모델은 이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지금 요양병원을 생각하면 이런 미래를 상상하기가 쉽다. 의료와 돌봄은 연속선상에 있을 뿐 아니라 돌봄과 자기 돌봄의 중요성이 기술 중심 의료를 압도할 것이다. 돌봄 자체의 중요성이 커지는 건 말할 것도 없지만, 의료 또한 ‘돌봄의 의료’로 변화해야 한다.

‘돌보는 의료’로 변화할 유일한 경로는

일부 지역의 인구가 줄고 민간 병·의원이 축소되는 것, 즉 의료 지상의 위축과 소멸은 시장 원리를 대신하는 의료체계의 대안을 구하도록 강제한다. 시장이 무너지면, 즉 시장이 성립할 여건이 되지 않으면 그런 지역 주민은 의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커뮤니티 케어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실 가능성과 무관하게 두 가지 대안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계속 시장 원리에 맡기는 방법으로 ‘부작위’의 대안이니 사실 대안이라 할 수 없다. 둘째는 전혀 다른 대안, 공공의료기관을 늘리는 한편, 민간과 시민사회까지 참여하면서 공공성을 중심으로 체계를 재조직하는 방법이다. 나는 후자가 피할 수 없는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장 원리를 벗어난 의료, 즉 공공성이 강한 의료체계로 가는 길이야말로 새롭게 ‘돌보는 의료’로 변화할 유일한 경로라고 믿는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사)시민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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