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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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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성착취 피해자 모자이크가 ‘배려’라는 궤변

2차 가해 일삼는 피고인 변호인의 변론… ‘피해자다움’ 찾으며 피해자 탓도
등록 2021-01-03 00:54 수정 2021-03-31 22:48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피고인은 피해자 동영상을 일부 배포하기는 했으나 피해자 특정을 피하기 위해 모자이크 처리를 하는 등 피고인 나름대로 배려했다.”

2020년 12월3일 제주지법 결심공판.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착취물 수천 개를 만들고 유포한 ‘배준환’의 변호인이 최후변론에서 뱉은 말이다. ‘배려’라는 단어가 피고인의 진정한 의사인지 재판부가 물었을 때 나는 말실수라고 정정할 줄 알았다. 하지만 변호인은 ‘배려’가 맞다고 재차 확인했다. ‘n번방 집단 성착취·성폭력 사건’과 비교했을 때,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도록 모자이크 처리했고 경제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으니 그 정도면 피고인이 ‘피해자를 배려’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변호인은 ‘배준환 사건’이 제주와 관련 없는데도 제주지검에서 수사하는 바람에 다른 지역에서 재판받을 때보다 과도한 양형이 우려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면 안 된다는 말로 최후변론을 마무리했다. 재판부는 적절한 처벌을 전제로 했을 때나 가능한 말이라며 일축했다.

전국 법원을 돌아다니며 나는 성폭력·살인 사건 등을 모니터링한다. 피고인 쪽 변호인의 최후변론을 기록할 때면 상식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를 자주 접한다. 피해자들이 결심공판까지 나오지 않기에 그들은 피해자를 2차 가해 하며 그 시간을 채운다. 그들의 전형적인 변론을 유형별로 정리해본다.

①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형

“피해자는 허위·과장 진술 습벽이 있습니다.”

피고인 쪽 변호인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기 위해 피해자가 원래 ‘이상한 여자’라고 주장한다. 사건과 관련 없는 피해자 사생활을 끌고 와 인신공격하는 전략을 택한다. 허위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배우 조덕제 성폭력 사건에서도 그랬다. 변호인은 사건과 무관한 허위사실(관련 내용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 조덕제에게 넘긴 지인 이재포는 실형을 선고받았다)로 피해자를 지속해서 공격했다. 조덕제뿐만이 아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 목사 이재록 등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서도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최후변론의 전략이었다.

② 진짜 피해자 찾기형

“피해자가 진짜로 피해를 입었다면 이렇게 할 리 없습니다.”

사건 이후 피해자의 일상이나 태도를 두고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이 많다. 그런데 일관성은 없다. 피해자의 고통 호소가 강하면 ‘피해자가 원래 예민한 성향이라 그렇다’고 주장하고, 고통 호소가 약하면 ‘진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한다. 나 역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로 증인신문을 할 때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응하자, 피고인 쪽 변호인은 ‘진짜 피해자라면 저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최후변론에서 주장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진짜 피해자’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피해자 뒤에 어떤 단체가 존재하고, 피해자는 그 단체의 의도대로 피고인을 모함하거나, 해당 단체의 비호를 받아 피고인을 압박한다는 이야기도 한다. 2015년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성폭력·교제폭력 등의 피해자들이 공론화와 법적 대응을 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양상이다. 2017년 초 문단 내 성폭력 사건에서 피고인을 변론하며 ‘외부 단체’를 운운한 변호사는, 2020년에도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른 피고인을 변론하며 피해자 뒤에 어떤 세력과 단체가 있다고 들먹였다. 여전히 음모론이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③ 동정에 호소형

“피고인은 어릴 적부터 음란물에 노출돼 왜곡된 성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습니다.”

2020년 디지털성범죄 사건 재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변론 전략 중 하나는 ‘심신미약’이다. 물증 확보가 용이한 사건의 특성상 공소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으니 대신 심신미약을 내세워 감형받으려는 작전이다. ‘고도비만’ 등에 따른 콤플렉스로 범행에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이나, 교정기관 근무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불법촬영을 했다는 주장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 요인으로 실제 반영되니 변호사들이 이런 변론 전략을 취한다.

피고인의 가정환경은 어떤가. 불우하면 불우한 것을 들어서, 유복하면 ‘사회적 유대관계가 분명하다’며 선처를 요구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가정환경은 불안정적이면 돈을 바라고 허위로 고소했다고 주장하고, 안정적이면 다른 이유를 붙여 무고 가능성을 부각한다.

혼인 여부도 피고인에겐 중요하다. 결혼했으면 가장의 책임을, 결혼하지 않았으면 부모 부양 의무를 말한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도 재판에 ‘결혼’을 활용했다. 2018년 5월 항소심 선고 2주 전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손정우 쪽은 결혼해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는 점 등을 들어 선처를 호소했다. 2심 재판부는 이를 손정우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받아들였다.

④ 피고인 미래 걱정형

“피고인의 나이를 고려해주십시오.”

피고인의 나이는 그게 몇 살이든 선처를 위한 변론에 활용된다. 미성년자일 땐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강조하고, 20대면 아직 사회 경험이 부족하거나 미성숙한 인격 혹은 판단력을 가졌다고 호소한다. 사회인으로 활발히 활동할 나이라면 사회 경력과 관계망을 들어 선처를 요청한다. 물론 고령이면 또 고령임을 이유로 엄벌을 피하려 한다.

피해자들에게는 어떤가. 16살 미만 아동·청소년에게도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하고, 갓 20살만 넘으면 성인이기 때문에 판단이나 대처의 완벽함과 성숙함을 요구한다.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에서조차 피고인의 미래와 꿈, 그리고 사회 복귀와 새출발을 말한다. 심아무개의 연인 살인 사건에서도, 박아무개의 여성 살인 사건에서도 피고인들은 수험서 등을 구비해 수감시설에서 미래를 꿈꾸고 있다며 이를 선처 이유로 들었다. 피해자들은 이제 꿈을 꿀 수도 없는데 말이다.

재판 모니터링을 하다보면 법률가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지는 경험을 많이 한다. 법리에 대한 날카로운 접근, 사실관계에 대한 철저한 입증과 방어 등은 판타지에 불과한 때가 있다. 최후변론을 하며 ‘나무위키’(누구나 자유롭게 작성, 수정하는 온라인 백과사전)를 근거로 내세우거나 ‘박사방’ 사건 가해자들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을 광고하는 변호사들을 만났을 때 그렇다. 피고인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혹은 승소하기 위해 전문성과 윤리의식을 내팽개치는 이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나. 신뢰는 타이틀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top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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