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나로 추정되는 불법촬영물이 올라왔다. 사진을 내려받으려면 비트코인 결제를 해야 한다. 나인지 아닌지 알려면 어쩔 수 없다. 내 사진이 맞다. 불법촬영물을 캡처한다. 이를 게시한 사람의 닉네임, 게시 날짜, 게시물 제목을 표에 쓴다. 채증 1호, 채증 2호….’
2019년부터 박아무개씨가 수집한 불법촬영 증거물은 90여 건에 이른다. 증거 목록을 만든 것은 경찰 수사를 대비해서다. 다음은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삭제를 요청할 차례다. 센터는 피해자에게 위임받아 불법촬영물이 게시된 사이트에 게시물 삭제를 요청해준다. 이르면 하루, 대체로 사흘 안에 삭제됐다. 센터에선 정기적으로 삭제 지원 보고서를 보내줬다. 아직 삭제되지 않은 게시물도 몇십 건 남아 있다. 그사이에 또 수십 건은 재유포되고 있다. 박씨는 매일 불법촬영물을 찾고, 채증하고, 센터에 삭제 요청을 한다. 벌써 1년째다. “센터에서 채증하기도 쉽지 않을 거예요. 인력이 부족하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직접 기록하고 있 어요.”
최근 5년간 불법촬영물 관련 범죄는 연평균 6천여 건 발생했다.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15~2019년 연평균 관련 범죄 발생 건수는 6192건으로, 2010~2014년 연평균 3330건에 견줘 86% 늘었다. 범죄 피해자의 불법촬영물 삭제 지원 요청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2020년 1~9월에만 9만2347건(1~6월 피해자 2101명)의 불법촬영 게시물 삭제를 지원했다. 센터가 지원한 피해 게시물 삭제 건수는 2018년 4월부터 12월까지 2만8879건(1315명), 2019년 9만5083건(2087명)으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에 있는 이 센터는 2018년 4월 개소했다.
그러나 센터에서 게시물 삭제를 지원하는 일을 맡은 인력의 근무기간은 평균 6개월에도 못 미친다. 센터 개소 이후 지금까지 관련 업무를 맡았던 인력은 총 56명인데, 이 가운데 14명이 퇴사했고 2년 이상 근무한 인력은 8명에 불과하다(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여성가족부에서 제출받은 자료). 올해 신규 채용된 26명도 넉 달만 근무한 뒤 퇴사할 예정이다. 단기계약 채용 방식이어서, 업무의 지속성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셈이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신속한 삭제와 모니터링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처여서 지속성과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라며 “장기적인 근무 인력에 대한 예산 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에게 부족한 지원 사업은 이뿐이 아니다. 게시물을 삭제하더라도, 아픈 마음은 삭제되지 않는다. “디지털성범죄의 경우, 피해자는 끊임없이 (불법촬영물) 유포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피해자 상담은 일반적인 성폭력 상담 지원 절차인 15~20차례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이뤄진다.”(2019년 12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펴낸 ‘디지털성범죄 예방 및 피해자 지원체계 발전 방안’ 보고서)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여성긴급전화(1366), 한국성폭력상담소, 해바라기센터 등에서 상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2년간 300만원의 의료비 지원을 받아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에서 정신과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2차 피해를 겪는 피해자들도 있다. 송아무개씨는 2019년 초 회사 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을 당했다. 가해자는 평소 친하게 지낸 회사 동료였다. 여자화장실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다른 동료가 주웠는데, 전화기에 유심칩이 없는 걸 이상하게 여겨서 살펴봤다. 몇 장의 사진과 영상이 발견됐다. 송씨가 모두 찍혀 있었다. 송씨는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성폭력상담소에서 소개한 정신과에서 상담도 받았다. “제가 사는 지역엔 성폭력상담소와 연계된 병원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의사가 저에게 ‘가해자가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냐’는 말을 하더라고요. 의사의 이런 인식이 더 상처가 됐어요.”
김아무개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학교 화장실에서 불법촬영물이 발견됐는데, 제가 찍혔죠. 성폭력 피해자 전담병원에서 상담받으며 ‘주위 남성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의사가 저에게 ‘남성혐오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래서 다른 지역의 전담병원으로 옮겼죠.”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2년 도입됐다. 전국에 316곳이 있다(2020년 1월 기준). 전담의료기관 지정을 원하는 병원이 신청하면 지방자치단체가 심사해 지정한다. 지정 기준이 뚜렷하지 않다보니, 의료진의 성폭력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전담의료기관 수도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 강남구·종로구·광진구·송파구 등에는 전담의료기관이 1곳뿐이다. 지방에는 시나 군을 통틀어 1개 병원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전담의료기관 지정은 운영기관의 정관을 살펴보고 의료법을 위반한 적이 있는지 등을 살펴서 지정한다”며 “성폭력 피해자 대응 매뉴얼 교육을 1년에 한 차례씩 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아동이 아닌 성인 여성 피해자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잣대로 보려는 등 의료진의 편견이 작동할 수 있다”며 “한 번 전담의료기관으로 지정되면, 재심사하거나 갱신하는 절차가 없으므로 여성가족부가 실태조사와 성폭력 관련 의무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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