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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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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 시도만 해도 감형되는 ‘마법’ 성범죄 합의

‘합의’시 맺는 처벌불원 의사…
강지환은 합의 뒤 입장 번복, 최종훈은 합의 덕에 최저 형량, ‘합의 실패’ 정준영도 감형
등록 2020-11-21 20:05 수정 2021-03-31 22:53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배우 강지환은 성폭력 범죄로 구속 상태에서 1심을 이어가던 중 피해자들과 합의에 성공, 이를 반영한 1심 재판부의 판단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피고인 쪽은 이후 항소·상고를 거치면서 언론을 이용해 피고인이 무죄라는 주장을 이어나갔고, 피해자들은 ‘꽃뱀’으로 불리며 추가 피해를 당했다. 범죄 혐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를 피해자에게 받아내 유리한 재판 결과를 끌어낸 뒤 돌변해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이 여전히 많다. 수사기관이나 재판부는 합의에 이르는 과정, 합의 내용, 합의 이후 피의자·피고인의 태도 등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합의’는 가해자의 족쇄를 풀어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성폭력 범죄와 관련해 ‘합의’ 자체는 감경 요소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피해자의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는다)’은 감경 사유가 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사회적 의미를 명확히 인식한 상태에서 표명한 피고인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를 감경 사유로 설명한다. 현실은 어떠한가.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합의했다는 사실만으로 선처한다. 구체적인 상황은 살피지 않는다. 그저 합의서에 쓰인 ‘피해자는 피고인(혹은 피의자)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구만을 기계적으로 반영한다.

그래서 가해자들은 선처받기 위해, 혹은 구속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피해자에게 합의를 요구한다. 수사 과정에선 소 취하를 유도하며, 합의 과정에서 금전적 요구를 피해자가 하거나 응하면 이후 합의에 실패해도 돈을 노리고 접근한 것으로 몰아간다. 재판 과정에선 합의해야 공소사실(범행 내용)을 인정한다고 하거나, 합의해야 법정 싸움이 길어지는 걸 막고 피해의 일부라도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 밀어붙인다. 합의에 실패해도 피고인에겐 불리하지 않다. 한국 법원은 합의에 성공해도, 합의에 실패해도 합의를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하면 피고인에게 유리하도록 판단한다.

어느 경우든 피고인에게 유리

강지환은 인신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합의를 악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1심 선고 전 합의에 성공해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기 위해 합의 단계에선 혐의 전체를 인정하는 것처럼 하다가, 합의서를 제출한 뒤에는 입장을 번복한다. 그래도 피고인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가수 최종훈은 어떤가. 그는 공소사실을 부인했지만 피해자와의 합의에 성공했기 때문에 재판부는 작량감경(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해 형을 줄임)으로 최저 형량을 선고했다. 정준영은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합의에도 실패했지만 ‘진지한 반성’을 한다며 감형했다. 그러나 해당 재판부는 이후 맡은 미성년 가해자의 선고 과정에선 합의에 성공했어도 이를 양형에 반영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2019년 나는 법원 젠더법연구회와 인터뷰하면서 성폭력 피해자 64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연구회에 전달했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합의 종용으로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답변했다. 피해자에게 합의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라, 조건이 붙거나 상황에 몰려서 하는 강요된 답이다. 어떤 미성년 피해자는 합의의 의미를 모르는 상황에서 ‘어차피 벌금형이니 합의하는 게 유리하다’라는 수사관 말만 믿고 합의에 응할 뻔했다고 한다. 또 어떤 피해자는 재판부가 합의를 강요하기도 했다.

“어차피 벌금형” 회유하는 수사관

설문에 응답한 대다수 피해자는 합의가 진정한 의미의 처벌불원 의사 표명이 아니라고 했다. 단지 수사와 재판 과정을 버티기 힘들어서, 경제적 어려움에 몰려서(피해자들은 피해 이후 대개 학업이나 생업을 중단한다. 나 역시 생업 중단 뒤 경력이 단절됐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민사소송으로 가도 소송 기간이 너무 길거나, 승소해도 배상받을 길이 없어서, 보복이 두려워서 합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합의는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설문조사 결과를 본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은 피해자들이 합의 과정에서 자신이 당한 피해를 알리는 창구가 적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재판부가 ‘합의’를 판단하는 방식은 일관성이 없다. 2020년 경남 창원에서 열린 ‘김아무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경우 다수의 피해자 가운데 몇몇 피해자와 ‘상당한 금원’으로 합의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감형된 바 있다. 재판부가 인정한 그 ‘상당한 금원’은 3개월 동안 피해 영상을 삭제하는 데 필요한 비용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과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갓갓(문형욱)’ 공범들 재판에선 재판부가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피고인이 ‘노력’한 점을 유리하게 반영했고, 서울고등법원에선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범이 합의 시도를 안 한 것을 불리하게 반영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반면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조아무개 제주대 교수’와 ‘전아무개 제주해경 함장’ 성범죄 재판에선 재판부가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꼼꼼하게 살펴서 최종 판단했다. 합의가 실제 피해자의 온전한 의사를 반영했는지, 합의 과정에서 합의를 빌미로 피해자에게 추가 피해를 주지 않았는지 등을 따졌다. 울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정아무개 외 11인 집단 성착취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이 합의에 응하며 처벌불원 의사를 수차례 전달했지만 재판부가 피해자의 나이와 상황 등을 모두 종합 고려해 진정한 처벌불원 의사인지 의심스럽다며 배척하기도 했다. 친족 성폭력에서 ‘피해자의 처벌불원’을 대법원이 강요된 형태라고 판단한 판결도 여러 건 있다.

‘합의’가 피해자 위해 활용되도록

나는 연대자로서 합의를 고민하는 피해자들에게 합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회복을 위해 어떤 기능을 하는지, 합의 과정에서 불이익이나 추가 피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합의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등을 상세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원래 이런 역할은 전문가가 해야 한다. 수사기관이나 법원도 소극적으로 피해자가 의사를 표명하기 기다리지 말고 확인해야 한다.

현실에서 합의는 가해자를 위해 활용되지만 피해자의 회복이나 일상 재구성을 위해 제대로 기능하지는 못한다. 가해자의 족쇄를 풀어주는 열쇠인 동시에, 피해자에게는 재갈이 되는 합의를 여러 방면에서 고민해봐야 한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https://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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