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9일 밤 10시께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재발을 막기 위한 형법 개정안 등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아동·청소년과 성관계하면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처벌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을 높이고(13살 미만→16살 미만), 아동을 성매매 범죄의 행위자로 바라보는 대상아동·청소년 개념을 삭제했다. n번방 사건으로 국민적 공분이 일자 꿈쩍 않던 법무부가 입장을 선회하고 국회가 응답한 결과다. ‘시절인연’(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인 셈이다.
“꿈인가, 생신가. 이런 날도 오는구나.” 챙겨본 적 없던 국회방송을 틀어놓고 그 순간을 지켜보던 임수희(50·사법연수원 32기·사진) 대전지법 천안지원 부장판사는 생각했다. 그는 법조계에서 손꼽히는 아동 권익 보호 전문가다. 주어진 법을 적용하는 판사는 혹시 모를 논란을 피하기 위해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직 판사’는 그래서, 드물다. 그러나 2010년 미성년자녀가 있는 이혼 사건(가사재판)을 맡으며 아동 권익 문제에 눈뜨게 된 임 판사는 법관윤리강령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학술대회 발표자로, 언론 기고자로 ‘아동·청소년을 보호하려면 법부터 바꿔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이번에 개정된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상향과 대상아동·청소년 개념 삭제는 임 판사와 아동·청소년 보호 단체가 수년간 강조해온 내용(‘투 트랙’ 해법)이다.
그러나, 겨우 ‘한 걸음’ 나아갔을 뿐이다. 4월30일 서울 양천구 인근에서 만난 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몸이 아파 응급실에 가면 응급조치를 하지 않나. 의제강간 기준연령 상향과 대상아동·청소년 개념 삭제는 아이들 보호를 위한 응급조치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 근본적인 조처를 강구해야 한다.”
“몇 살이었니”만으로 보호할 수 있어야
응급조치에 불과하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들은 생존과 관련된 필요나 도움, 관심, 애정을 제공하면서 접근하는 어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방치된 아이의 결핍을 알아챈 가해자는 ‘용돈 필요하지 않냐’ ‘재워주겠다’며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그 대가로 성관계를 맺는다. 그 과정에서 가해자에 대한 아이들의 애정이 생겨나기도 한다. 우리나라 성범죄의 기본 구성 요건인 폭행이나 협박, 사람의 의사를 제압하는 유·무형의 힘(위력)이나 속임수(위계)를 (가해자가 아이들에게) 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아이들이 성을 착취당하는 피해를 입어도 현행법으로는 처벌이 어려웠다. 아이들의 이런 기본적인 특성을 이해한다면, ‘그때 네 나이가 몇 살이었니?’ 이 질문 하나만으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부가적인 (피해) 입증을 아이들에게 요구해선 안 된다.”
의제강간 조항은 아이들을 성욕 충족 대상으로 삼는 어른들을 처벌함으로써 ‘아이들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 보호연령이 전에 초등학생까지(12살)였다가, 이번 법 개정으로 중학생까지(15살) 올라갔다. 그리고 대상아동·청소년 개념 삭제로 성착취의 대상이 됐던 아이들을 완전한 피해자로 보호할 수 있게 됐다.
이 법이 통과되기 전, 13살 이상 아이와의 성관계는 폭행·협박·위계·위력이 사용되지 않으면 처벌이 어려웠다. ‘용돈’ ‘숙박’ 같은 대가라도 주어지면 아이는 오히려 성매매자로 취급됐다. ‘하은이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4년 엄마의 휴대전화 액정을 깨뜨리자 혼이 날까봐 가출한 하은이(당시 13살·가명)에게 일주일 동안 성인 남성 6명이 성폭력을 저질렀다. 하은이는 지능이 7살 정도인 지적장애아였다. 하지만 하은이 나이가 당시 의제강간 연령(13살)보다 2개월 더 많아 가해자 처벌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성매수자가 떡볶이를 사주거나 재워줬다는 이유로 하은이는 자발적인 성매매자(대상아동·청소년)로 판단됐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를 엄벌하는 외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가 의제강간 연령을 만 16살로 설정해두고 있다. 영국에선 법을 개정해 ‘아동 성매매’(Child Prostitution) 대신 ‘아동 성착취’(Child Sexual Exploitation)라는 용어를 공식 사용한다. 우리는 이제 겨우 국제 기준을 따라잡았다. 임 판사가 이번 법 개정을 응급조치로 비유한 배경이다.
급한 불은 껐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범죄와 형벌을 규정하는 형사법 체계에서 성범죄의 보호법익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호법익은 어떤 처벌법 규정을 통해서 보호하려는 이익을 말한다. 살인죄의 보호법익은 생명, 상해죄의 보호법익은 신체, 명예훼손죄의 보호법익은 명예다. 그런데 성범죄만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이라 한다. 이상하지 않나. 왜 성범죄만 ‘성’ 자체를 보호하지 않고, 단지 그에 대한 자기결정권으로 좁혀서 보호하려 하는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해체해서 보자
형법에서 성범죄를 규정한 제32장의 제목은 원래 ‘정조에 관한 죄’였다. 강간과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이 부녀의 정조였던 셈이다. 이 ‘정조에 관한 죄’라는 제목이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된 게 불과 1995년이다. 성범죄의 보호법익이 ‘정조’에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보다는 진일보했지만, 임 판사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성범죄의 본질에 접근하는 정확한 도구인가’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범죄와 비교하니 분명 차이가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해체해서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성행위를 허용할 것인지, 즉 예스인지 노인지 결정할 권리’를 침해했는지만을 따질 게 아니다. 아이는 물론, 어른이라 하더라도, 성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와 동반되는 수단·방법, 성행위의 양태 등에 따라서 신체적·정신적 침해를 받을 여지가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 인간의 인격 그 자체를 침해받을 수도 있다.”
실제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명분으로 악용되기 쉽다. 현행법에서 성범죄는 폭행이나 협박, 위계, 위력을 통해 피해자의 의사가 제압되거나 교란돼야 성립한다. 피해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거절했는지에 판단의 초점이 맞춰지고, 피해자가 “성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성관계가 정당화되기도 한다. 이는 장애인, 아동·청소년과 같이 의사결정에 취약한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제대로 규율·통제되지 못했던 원인으로 꼽힌다.
임 판사는 성범죄의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에서 성이나 인격 자체로 옮겨가야 한다고 본다. 특히 아동에 대한 성범죄의 보호법익은 아동의 건강하고 온전한 성적 발달과 성장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단지 아이가 특정 성행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선택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판단만으로 유무죄를 다루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연령과 발달 수준을 기초로 온전한 성발달에 어떤 영향 또는 해악을 미치는가를 기준으로 성범죄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시각에선 판단의 초점이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넘어서기 때문에 비동의간음죄 도입은 물론이고 그루밍 성범죄도 처벌 대상으로 포섭이 가능해진다.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신뢰와 호감을 쌓고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저지르는 성폭력을 말하는데,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서 흔히 목격된다. 물론 이 같은 보호법익 변화는 법이 개정돼야 한다.
‘법이 원래 그래요’ 할 수 없어서
아동·청소년의 현실을 외면한 법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임 판사의 고민과 탐구 동력은 무엇일까. “그저 재판을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고 그는 답했지만 활동 범위는 분명, 그 이상이다. 2013년 인천지법 부천지원에서 ‘회복적 사법’(가해자에 대한 처벌보다 대화를 통해 가해자 책임, 피해자 회복, 공동체 평화를 도모)을 형사재판에 시범 적용한 뒤 꾸준한 관심과 연구를 담아 책 <처벌 뒤에 남는 것들-임수희 판사와 함께하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2019)를 펴냈다. 2017년 7월, 판사·가사조사관·변호사·소아정신과 의사·아동 전문가들과 함께 아동권익보호학회도 만들었다. 이혼 예정인 부부의 미성년자녀를 어떻게 잘 보호할지에 대한 고민도 깊다.
아동 성보호 문제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일탈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있고, 그 과정에서 여자아이들은 성매매까지 하는구나’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2017년 법원에서 젠더법 관련한 법관 연수를 받았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의 ‘성폭력 피해 아동의 인권과 법원의 역할’이라는 강의였는데 아동 성학대·성착취 실태를 처음 알게 됐다. ‘법 자체의 한계인데 왜 법원과 판사만 욕하나’ 생각하다가, 그럼 ‘그 상태로 계속 살 거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부터 현행법 논리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을 고민했다. 입법자는 아니지만, 법조인으로서 ‘법이 이렇기에 어쩔 수 없다’고만 할 수 없었다.”
임 판사는 현재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가정폭력·아동학대 사건, 이혼 등 가사재판을 담당하고 있다. 퇴근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고 주말 근무도 잦다.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이제 막 찾아온 변화의 시작을 끝까지 지켜보려 한다. 이제 고작 ‘한 걸음’이지만, 겨우 내디딘 ‘첫걸음’이기에.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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