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6일 핀란드 사회보험청(KELA)이 전세계 많은 연구자와 정책결정자가 기다리던 기본소득 정책실험 최종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핀란드는 2017년부터 2년간 25~58살 실업자 중 2천 명을 무작위 선발해 매월 560유로(약 70만원) 기본소득을 주는 실험을 전개했다. 당시 중앙당의 유하 시삘라 총리가 이끄는 우파연합정부는 고용 촉진을 통한 생산성 확대와 복잡한 사회보장 시스템 개혁을 위해 2천만유로를 투입해 기본소득 정책실험을 추진했다. 공동연구진의 면밀한 검토를 거쳐 실험 계획이 제안됐고, 의회 심의 등 입법 과정을 밟아 정부 주도로 실행된데다, 실험 종료 뒤 1년6개월 동안 이루어진 체계적·과학적 평가 등이 맞물려 핀란드 모델은 세계 언론과 정책결정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고용률에선 큰 차이 보이지 않아
실험집단과 통제집단으로 나눠 2년간 실시한 정책실험이 끝난 뒤, 핀란드 사회보험청과 헬싱키대학 등의 공동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의 공식 정보와 설문조사, 심층 면담 등을 거쳐 결과를 수집,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2019년 상반기에 예비결과 형태로 먼저 보고됐다.
실험 첫해인 2017년의 변화를 관찰한 예비결과를 보면, 두 집단 사이 고용률 변동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으나 건강, 자신감, 신뢰, 재정안정성, 미래 낙관 등 복리와 삶의 질 전반 지표에선 기본소득 수급자가 기존 실업수당 수급자보다 현저히 나은 모습을 보였다. 고용률에 차이가 거의 없는 결과를 두고 많은 국제 미디어에선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은 오히려 기본소득 수급자의 고용률이 낮아지지 않은 점에 주목하며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사회보험청은 2018년 데이터까지 함께 분석해야 최종 결과를 평가할 수 있다며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그 최종결과가 이번에 발표된 것이다. 보고서 내용을 요약한 영어판 보도자료 형태로 나왔지만, 사회보험청에서 공개한 핀란드어판 보고서 전체를 살펴보았다. 오래 기다렸던 결과이지만, 이번에도 그림은 여전히 모호하고 복합적이었다.
먼저 고용률을 살펴보자. 실험 초기 두 집단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던 고용률은 2017년 10월부터 격차가 나타나 그 뒤 1년간 약 2% 차이를 유지했다. 2018년 기준으로 기본소득 수급자의 연간 고용 일수가 기존 실업수당 수급자보다 6.34일 많았다. 연구를 주도한 경제연구소(VATT)의 까리 하마라이넨 선임연구원과 헬싱키대학 헤이끼 힐라모 교수는 1년 동안 일주일 정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며 애초 목표했던 고용 촉진 효과 측면에서 기본소득 실험 결과는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
실험 중간 ‘처벌적 제도’ 변수 등장
이 결과를 어떻게 봐야 할까? 기본소득 옹호론자라면 적어도 실험 2년차의 결과는 고용 일수에서 의미 있는 차이를 보였고, 기본소득 수급자의 고용 일수가 더 늘어났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문제는 이 차이가 어느 정도 기본소득의 영향 때문인지를 이번 실험에서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험 중간인 2018년 1월1일부터 핀란드 정부가 ‘고용 활성화 모델’을 도입해 시행하면서 실험집단과 통제집단 모두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구직활동 여부를 입증하지 않으면 실업수당을 일부 삭감하는 처벌적 제도가 갑자기 생겨나면서, 이것이 실업수당 신청자는 물론 고용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기를 희망하는 상당수 기본소득 수급자의 행동 유형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험 결과에는 두 제도(기본소득과 고용 활성화 모델)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터인데 각각의 제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현재 정확히 분석할 수 없어 보인다. 실제로 5월6일 최종 발표회에서 연구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모른다”는 답변을 계속 고집했다.
반면 설문조사 결과에서 기본소득 수급자는 일반 실업수당 수급자보다 주관적 복리나 삶의 질 지표에서 명확히 높은 수치를 보인다는 게 다시 확인됐다. 기본소득 수급자는 삶의 만족도와 건강, 심리적 복지와 우울증, 인지 능력, 경제적 복지와 자유, 관료주의에 대한 경험, 사회적 신뢰 등 다양한 지표에서 전반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이는 예비결과에 이어 최종결과에서도 확인되는 반응이다. 자산이나 의무조건 없이 제공되는 기본소득의 특징과 연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편주의적 사회보험과 공공서비스가 발달한 북유럽 복지국가에서 시민들의 행복과 삶의 질, 그리고 사회적 신뢰가 높게 나타난다는 점은 여러 선행 연구가 밝혀온 사실이다. 보편주의적 특징을 공유하는 기본소득 제도 역시 유사한 효과를 나타냈다.
이번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기본소득 수급자 81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질적 분석 결과다. 연구진은 20세기 탁월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의 세 유형으로 제시한 ‘노동’ ‘제작’ ‘행위’의 범주에 따라 인터뷰 결과를 해석했다. 일부 기본소득 수급자는 다양한 일과 노동 활동을 수행했고, 예술 활동과 창업 등 제작에 가까운 활동에 더 많이 참여했다. 또 일부는 자원봉사와 공동체 참여 등 공적 행위에 적극 참여했다. 이는 기본소득이 대안적 소득보장제도로 기능하는 데 그치지 않고 21세기 시민공화주의 또는 참여민주주의 공동체 실현에도 중요한 잠재력이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여기에서도 연구 결과는 복합적 그림을 제시하며, 기본소득 실험과 무관하게 이미 어려운 삶의 도전에 직면한 사람들이 그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을 함께 그린다.
다양한 ‘노동’, 예술 ‘제작’, 자원봉사 ‘행위’
핀란드 사례는 국민국가 수준의 첫 기본소득 실험으로 체계적, 과학적 정책실험에 기반을 둔 효과적인 제도 개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참신한 시도다. 그러나 애초 고용 촉진 효과를 중심으로 설계된 실험이라는 디자인적 문제와 더불어, 보편적 기본소득 구상과는 정책 목표와 원리가 상반되는 고용 활성화 모델을 실험 중간에 갑자기 도입하는 등 정치적 오류와 한계도 관찰된다. 현 핀란드 총리인 산나 마린 정부 프로그램에는 새로운 기본소득 실험 계획과 예산이 포함돼 있다. 그 사업을 실제 추진할지, 혹은 다른 방향의 사회보장 시스템 개혁을 추구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핀란드 바깥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기본소득 실험과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은 그 선두에 선 나라 중 하나다. 강점과 약점을 모두 보여준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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