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여름은 ‘밤 없는 밤’이라 부르는 백야의 날들 속에서 흘러간다. 핀란드 북쪽 끝 도시 우츠요키에선 7월27일까지 해가 지지 않는다. 그러나 7월 말이 지나고 밤하늘에 별이 돋기 시작하면 이제는 다시 학교와 일터로 돌아갈 계절이 된다. 실제로 8월 둘째 주가 되면 긴 여름방학을 끝내고 각급 학교들이 새로 문을 열어 가을학기를 시작한다. 언론은 일주일 내내 새 학기의 풍경과 달라진 규정 또는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특히 9년제 종합학교(Peruskoulu) 신입생과 그 학부모들을 위한 다양한 뉴스와 전문가 조언을 비중 있게 다룬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대유행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와 교육 당국의 정책과 이를 둘러싼 교사, 학부모, 학생 등 교육공동체 구성원들의 반응이 뉴스의 중심을 차지했다.
음악 시간엔 집 안 도구로 리듬 만들기
핀란드는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이 본격화한 3월 중순, 비상조치법에 따라 전국적인 학교 폐쇄 결정을 내렸다(주간돌봄센터는 계속 개방). 이후 5월 중순까지 두 달 가까이 학교는 학급별로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원격교육을 했다. 구체적인 원격교육 방식은 교사가 자율적으로 정했다.
필자의 자녀는 현재 핀란드 종합학교 8학년(한국의 중2)이다. 7학년이던 지난 상반기에 다양한 원격교육 수업을 경험했다. 국어(핀란드어) 선생님은 교과서 수업과 별개로 학생들이 만화 시리즈물을 선택해 읽고는 작가, 작품 내용과 구성, 시대 배경, 인물별 역할 등을 분석하게 했다. 미술 선생님은 온라인에서 3차원(3D) 프로그램을 이용해 물건을 디자인하는 과제를 냈다. 음악 선생님은 클래식 곡을 듣고 연상되는 장면 쓰기, 광고 음악 분석하기, 집 안 도구를 활용해 리듬을 만든 뒤 이를 녹음해 제출하라고 했다. 가정경제 선생님은 학생들이 직접 요리와 주방 청소를 하고 증빙 사진을 제출하도록 했다.
물론 외국어, 수학, 과학 등 기본 과목들은 교과서 진도를 중심으로 온라인수업과 과제물 제출이 주를 이루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외부에서 제작된 획일적인 강의 영상을 링크하고 학생들이 수동적으로 보게 하는 일은 없었다. 일부 교과목은 교과과정에서 정한 진도를 다 나가지 못하고 방학을 맞았는데, 이들 과목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해당 부분부터 진도를 나가고 있다. 1980년대 이래 교육정책 분권화와 더불어 학교와 교사의 자율성이 확대된 핀란드 학교 교육 시스템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모습이다.
한편, 학부모들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학교와 교육 당국의 대응 정책과 권고 지침부터 자녀의 수업 참여 상황, 과제, 교사의 평가와 피드백 등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소통할 수 있다. 2020년 4월28일,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는 학부모협회, 교사노조, 지방자치단체연합, 공영방송 <윌레>(YLE)와 공동으로 전국 단위의 온라인 학부모 대화 프로그램을 열어 코로나19 상황에서 원격교육의 경험에 관해 토론했다. 교육장관과 국가교육위원회 사무총장, 학부모협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원격교육 시기의 학습, 학생 복지, 학교와 가정의 소통을 주제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공영방송이 제작한 영상물을 통해 코로나19 시대의 배움과 가르침에 관한 학생과 교사의 관점을 청취하고 학부모와 교육·복지 전문가들의 문답과 대화가 진행됐다. 이 과정은 공영방송 웹사이트 등을 통해 생중계돼 전국에서 많은 부모가 참여할 수 있었다.
전국 학교 폐쇄 풀고, 지자체별로 유연하게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년(2020-2021)이 시작되자 5월 중순부터 재개된 대면교육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원격교육을 할 것인가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마침 7월 하순부터 유럽 각국에서 감염병 2차 유행 조짐이 보이고, 핀란드에서도 6~7월에 비해 확진자 수가 늘고 있었다. 다행히 핀란드의 감염병 상황은 심각하게 나빠지지 않았다. 점차 안정세를 유지하자 핀란드 정부는 가을학기에 초·중·고 학교가 대면교육을 하도록 결정했다. 대신, 정부는 관련 법률을 개정해 하반기부터 필요한 경우 지방자치단체의 결정으로 지역에서 학교 폐쇄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필요하다면 대면교육과 원격교육을 주 단위로 번갈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상반기 경험을 토대로 더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팬데믹 상황에 대처하도록 한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앞으로 전국 단위의 학교 폐쇄 결정은 내려지지 않을 전망이다.
2020년 8월11일 다수 학교의 개학일에 맞춰 리 안데르손 교육장관이 발표한 담화가 널리 회자됐다. ‘불확실성 시기에도 배움의 기쁨을’이라는 제목의 발표문이다. 안데르손 장관은 코로나19 위기에서 정부와 교육 당국의 기본 교육정책 방향(학생 건강과 안전, 양질의 수업 운영, 교사의 노동 복지 보장 등)을 설명했다. 특히 상반기 원격교육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뒤처진 학생이 많이 생겨 이들에 대한 교육 지원 수요가 예외적으로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장 취약한 상황에 있는 학생, 곧 특수교육을 받거나 (소년원 등) 감독 교육을 받는 학생, 의무교육이 연장된 학생(10학년), 그리고 예비학교 학생부터 3학년까지 모든 어린 학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학교와의) 접촉이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새로운 도전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그는 핀란드 정부가 지방정부와 학교에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8400만유로를 지원했음을 밝히면서, “중요한 건 학생들의 지원 필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따라 학기 초에 즉시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다. 추경예산을 통해 코로나 팬데믹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역량과 복지에 오래가는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설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안데르손 장관은 교육 공급자로서 지방자치단체 정책결정자들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며 발표문을 끝맺었다. “지방의 결정자가 어린이, 청소년의 지위와 교육에 대한 권리를 정책 우선순위로 삼을 준비가 되었기를 바란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배움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차분히 교육 불평등 막는 데 노력
핀란드에서 새 학년이 시작되고 그새 한 달이 지났다. 벌써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래 교육에 대한 담론이 무성한 한국과 달리, 핀란드는 차분하게 코로나 상황이 야기하는 교육적 도전 과제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특히 학력 격차와 정신건강 문제 등 교육 불평등이 심화하는 위험을 막고 모든 학생이 ‘배움의 기쁨’을 누리며 자신의 역량을 증진하고 인간적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돕는 일,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 등 교육 주체가 과도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겪지 않고 함께 대화하며 해법을 찾아가는 일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디지털 원격교육의 활성화 차원을 넘어 교육 불평등 해소와 신뢰에 기반을 둔 교육공동체 건설을 위한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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