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장기화로 넷플릭스 구독자가 늘면서 TV와 영화산업 전반에 큰 변화를 낳고 있다. 한국 시청자도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나라와 지역에서 생산된 콘텐츠를 새롭게 만난다. 북유럽 드라마도 그 물결을 타고 한국 시장에 당도했는데, <보르겐>(Borgen·사진)이라는 덴마크 정치드라마 시리즈가 그중 하나다. 덴마크어로 보르겐은 ‘성’(The Castle)이라는 뜻으로 덴마크 의회와 총리실이 위치한 크리스티안보르궁의 약칭이다. 드라마는 덴마크 민주주의와 정치의 센터라 할 보르겐을 중심 무대로 설정해 ‘비르기트 뉘보리’라는 중도자유주의 계열 정당(드라마 속 명칭은 ‘온건당’) 소속 여성 정치인이 극적인 선거 승리로 첫 여성 총리에 오른 뒤 수많은 도전과 딜레마를 헤치며 유능한 정치적 리더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드라마 자체는 2010년 첫 시리즈가 제작, 방영된 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일찍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드라마가 BBC에서 방영된 뒤 배우들은 영국에까지 초청되어 큰 인기를 얻었는데, 정치인들조차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덴마크 문화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총리 모습 등에 매료돼 덴마크어를 배우는 사람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필자도 박사과정 유학 시절 이 드라마를 핀란드 공영방송에서 보았는데, 덴마크 정치와 민주주의의 속살을 생생하게 그려내 마치 연구 대상을 탐구하듯 진지하게 시청한 기억이 있다. 이번에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에서 이 드라마가 화제라고 해 다시 시리즈 몇 편을 감상했다. 10년 세월에도 탁월한 스토리 전개와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역할, 코펜하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려한 장면 등 드라마의 매력은 여전했다.
매 편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지만 그중 일부는 덴마크의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좋은 텍스트를 제공한다. 우선 첫 에피소드는 주인공 비르기트가 소수정당 대표로 선거에 임한 뒤 예기치 않은 대승 후 총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당 대표들 간 협상과 전략적 상호작용을 그린다. 더 많은 의석수를 가진 정당들이 있지만 모두 지난 선거에 비해 의석수를 크게 잃은데다 스캔들과 내홍에 휘말린 상태여서 비르기트가 정부 구성 주도권을 여왕에게서 부여받는다. 이후 비르기트는 각 정당 대표들과 만나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에 나서는데, 안정적 정부 운영을 위한 다수 연합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관건이 된다.
실제 (권역별) 전면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통해 다당제 정당체계와 연합정치가 발달한 북유럽에서는 선거 결과 1당을 차지한 정당의 대표가 정부 구성 주도자가 되며, 그가 제 정당에 주요 정책 의제에 관한 공식 의견을 요구한 뒤 그 대표들과 협상에 나선다. 사회구조와 정당체제가 비교적 안정됐던 20세기 중반과 달리, 최근에는 좌우 스펙트럼을 넘나드는 다양한 연정 방식이 시도된다. 북유럽의 전형적 정당체계는 좌파 정당 2개(사회민주당, 급진좌파당)와 우파 정당 3개(자유당, 농민-중앙당, 보수당)로 이루어진 5정당 체계인데, 1973년 덴마크의 ‘지진 선거’(정당 체계를 바꿀 정도로 큰 균열과 판도 변화를 불러오는 선거)를 계기로 녹색당과 우파 포퓰리즘 정당 등 신생 정당이 대거 등장하며 7∼8개 정당체계로 진화했다.
현재 덴마크 의회에는 10개 정당그룹이 활동할 만큼 파편화된 다당제 정당체계의 면모를 보인다. 드라마에서 비르기트는 녹색당 등 일부 소수정당과 주요 정당인 노동당(실제 덴마크에는 노동당이 없고 사회민주당이 존재한다)을 묶어서 의회 179석 가운데 90석을 차지하는 최소 다수 연합을 만드는 데 극적으로 성공한다. 내각의 장관직 지분은 정당별 의석수 비율에 비례해 정해지며 재무장관과 외교장관 등은 중요한 직위여서 종종 정당들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진다.
한국 승자독식 민주주의와 사뭇 다른간신히 정부 구성에 합의했지만 총리 취임 초기부터 비르기트는 끝없는 도전에 직면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첫 예산안의 의회 통과다. 선거 이후 내분으로 사임한 전임 노동당 대표의 사주로 노동당 의원 두 명이 예산안 통과에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두 의원의 개별적 설득에 실패한 비르기트는 야당 중 강성 우파인 뉴라이트당(역시 가상 정당이다)과 협상해 예산안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의회 과반 지지 획득에 성공한다. 이를 통해 예산안 통과는 물론 의회의 정부 불신임 투표에도 부쳐지지 않고 안정적인 정부 운영을 계속하게 된다.
실제 덴마크에서는 전후 성립된 역대 정부 대부분이 의회 과반에 못 미치는 소수 정부였다. 소수 정부가 의회 입법과 예산안 통과 등에 실패함으로써 정국 불안정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비교정치학의 오랜 경고와 달리 ‘소극적 의회주의 원리’(Negative Parliamentarism·다수가 반대하지 않는 한 정부 유지 가능)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의제별 협상 전략으로 그런 위험을 극복한 사례를 덴마크는 보여준다.
이처럼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보르겐>을 통해, 민주화 이후 승자독식의 강한 다수제 민주주의를 운영해온 한국과 사뭇 다른, 덴마크의 정치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다. 덴마크는 최근까지도 시민들의 자국 민주주의 만족도가 90%를 넘고, 총선 투표율도 85% 이상을 유지할 정도로 건강한 민주주의를 과시한다. 흥미롭게도 드라마 방영 이후 2011년 덴마크에서 첫 여성 총리가 나왔다. 드라마가 시간을 앞질러 가며 변화하는 정치 현실을 예고한 셈이다.
2019년 총선 이후 당시 41살의 나이로 선출된 현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사회민주당)도 젊은 여성으로 핀란드, 뉴질랜드 등 젊은 여성 총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마침 넷플릭스와 덴마크 공영방송 가 합작해 <보르겐> 시리즈4를 제작해 2022년에 방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합의정치와 시민 삶에 가까운 민주주의를 통해 행복 국가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덴마크를 계속 지켜보자.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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