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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정치학] 세금을 줄이니 불평등이 커졌다

‘2020년 핀란드 불평등 보고서’가 코로나 시대에 알려주는 것
등록 2020-12-06 08:28 수정 2020-12-11 01:21
2020년 5월 핀란드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이 숲에서 수업하고 있다. 교육 강국 핀란드에서도 1990년 이후 불평등 확대로 교육 격차가 커지고 있다. 로이터

2020년 5월 핀란드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이 숲에서 수업하고 있다. 교육 강국 핀란드에서도 1990년 이후 불평등 확대로 교육 격차가 커지고 있다. 로이터

코로나19 전후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로서 불평등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가을학기 학생들과 토마 피케티의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읽었다. 2013년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킨 <21세기 자본>에 이어, 신작 역시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사회적 불평등이 재증대한 사실을 집중 조명한다. 북유럽을 비롯한 현대 복지국가와 민주주의 체제가 당면한 전환기적 도전과 혁신 과제를 연구하는 정치학 전공자로서 특히 반갑게 마주친 대목이 있다.

피케티, 북유럽도 불평등 재확산 대응 못해

첫째, 과거 신분제 사회로부터 오늘날 ‘하이퍼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불평등주의 체제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서는 (또는 그것의 극복을 위해서도)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차원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통찰이다. 둘째, 오늘날 심화하는 불평등 체제의 주요 원인으로 자산·소득 불평등과 결합한 교육 불평등(특히 고등교육 접근 기회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정책 혁신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셋째, 발달한 서구 민주주의 체제가 점점 더 이른바 ‘브라만 좌파’(고학력 고소득 계층으로 미국 민주당이나 유럽 사회민주당의 주된 지지층)와 ‘상인 우파’(높은 자산 보유 계층으로 미국 공화당 등 보수 정당의 주된 지지층)가 번갈아 지배하는 다중 엘리트 지배 체계로 변모해왔다는 경고다. 넷째, 지난 세기 가장 빼어나게 불평등을 줄이고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한 북유럽 사민주의 체제조차 (역사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의 한계에 갇혀 세계적 차원 불평등 체제 재확산에 온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2020년 8월, 피케티의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하며 2020년 시점에서 북유럽 복지국가인 핀란드의 불평등 실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단행본 보고서가 나왔다. 유학 시절 박사과정 동료였던 마이야 마띨라 박사가 편집하고 경제학·정치학·사회학·교육학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참여해 자산·소득 불평등, 건강 불평등, 교육 불평등, 세대 간 불평등, 불평등과 정치 참여(소득수준이 투표율과 정당 선택에 미치는 효과), 청소년의 인종차별 경험 등을 연구 조사한 결과물이다. 보고서를 발간한 곳은 핀란드 사민당 계열 싱크탱크인 깔레비 소르사 재단으로 사민주의 가치·철학에 기반한 정책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보고서는 지니계수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지표와 최신 통계 데이터를 활용해 핀란드 사회의 불평등 실태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교육 대물림 강화를 경고

특히 많은 관심을 받은 의제는 부·소득 불평등과 교육 불평등이었다. 보고서는 복지국가 건설기인 1966~1990년과 글로벌 경쟁국가 시기인 1990~2017년의 계층별 소득 발전 추이를 비교·분석했다. 북유럽 후발주자였던 핀란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본격적인 복지국가 건설에 매진했고, 사민당과 중앙당 연합 정치로 교육·건강·사회서비스·조세 등에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탈냉전과 세계화가 본격화한 1990년대 이래 핀란드는 유럽연합과 유로존에 연달아 가입했고,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후반 두 차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두 시기의 부·소득 불평등 추세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앞 시기에는 저소득층 소득이 고소득층보다 더 큰 폭으로 늘어남으로써 소득 불평등이 감소했다. 반면 뒤 시기에는 고소득층 소득 증가폭이 저소득층보다 더 커지면서 소득 불평등이 증가했다. 구체적으로, 1966~1990년 하위 10분위 소득은 연평균 4.9% 상승했지만 상위 1%의 소득은 1.9% 상승했다. 반대로 1990~2017년 하위 10분위 소득은 연평균 0.8% 상승했지만 상위 1% 소득은 3.6% 상승했다. 전체 부의 불평등 또한 비슷한 추세를 보여 1990년대 동안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불평등이 심화했다. 그 결과 1987년 전체 65%에 이르던 하위 90%의 부는 2017년 54%로 줄어든 반면, 가장 부유한 1%의 부는 같은 시기 8%에서 13.5%로 늘어났다. 대조적 발전을 가져온 핵심 이유로 1993년 자본세를 누진세에서 제외하고 세율도 대폭 낮춘 조세개혁 효과를 꼽았다. 또한 자산·소득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해법으로 조세제도의 진보적 개혁 혹은 복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부와 소득 불평등의 심화 경향은 건강·교육·인종차별·민주주의 등 사회적 영역과 의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보고서는 핀란드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여전히 높은 수준의 교육 평등과 성취를 유지하지만, 통시적 측면에서 볼 때 핀란드 내부에서 교육 수준의 대물림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부모 교육 수준이 높은 가정의 아이가 더 높은 단계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경향이 커지고, 핀란드어나 스웨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아이와 이민자 자녀 사이 상급학교 진학과 교육 성취도에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의무교육을 확대하고, 교육 진로의 개방성을 늘리고, 고등교육 접근 기회를 확대하고, 이민 배경 학생의 진학 관련 보호 조치를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피케티가 분석한 대로 신자유주의와 ‘소유자사회’ 이데올로기 영향력이 강한 미국 등의 불평등 심화 추세에 비하면 여전히 핀란드 사례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수준의 변화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 일원으로 복지국가 건설과 적극적 조세와 사회정책을 통해 불평등을 획기적으로 줄였던 핀란드에서도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이 관철되고, 이로 인해 불평등 감소에서 확대로 양상이 역전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젊은 총리 앞에 놓인 큰 과제

2019년 총선에서 불평등이 중심 의제로 부상했고,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 개혁과 긴축정책을 추진하던 보수연합 정부가 실각하고 젊은 여성 총리 산나 마린이 이끄는 사민당 중심 5당 연합 정부가 성립됐다. 새 정부는 정의롭고 평등하며 포용적인 핀란드 건설을 정부 프로그램의 핵심 목표 중 하나로 설정해 관련 정책과 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한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속에 새롭게 제기되는 불평등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장기간 진행된 불평등 심화 경향을 역전할 수 있을지는 아직,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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