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서현수의 북유럽 정치학

유럽도 밤잠 설치는 ‘트럼프 악몽’

미 대선 불복하며 의회 습격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우리에게 던진 세 가지 메시지

제1347호
등록 : 2021-01-15 02:54 수정 : 2021-01-17 11:51

크게 작게

2021년 1월6일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의사당 건물 서쪽 입구에 모여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백야가 계속되는 여름과 달리, 핀란드의 겨울은 어둡고 긴 밤의 시간이 지배한다. 북극권에 속한 라플란드 지역에선 11월 말부터 다음해 1월 중순까지 지평선 위로 해가 뜨지 않는 ‘까모스’의 날이 계속된다. 다행히 숲과 호수를 하얗게 덮은 눈 위를 비추는 신비로운 여명의 빛을 만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상황 속에서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왔고, 인류 역사상 ‘암흑의 해’로 기록될 2020년이 끝났다. 백신의 개발과 보급이 시작되면서 2021년 여름 이후 점차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영국 등에서 나타나 확산되는 바이러스 변이들과 실업, 파산, 빈곤, 소외 등 경제·사회적 한계상황에 내몰린 사람들, 그리고 지구촌 곳곳의 한파와 폭설 등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새로운 재난 등 거대한 불확실성과 위기의 시간이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급기야 2021년 1월6일 미국에서 대통령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의 최종 승인 절차를 진행하는 의회 의사당에 난입해 난동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여러 사망자가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전세계로 전파된 뉴스와 실시간 동영상을 통해 세계의 시민들은 트럼프 대통령 시기를 통과하면서 중대한 위기와 퇴행을 겪어온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추락한 것인가, 질문하며 큰 충격에 휩싸였다. 트럼프는 이날 집회에 참석해 참가자들에게 의회로 행진하면서 의원들을 압박하라는 취지의 연설을 한 것으로 알려져 공분을 샀다.

유럽에서도 많은 시민이 깊은 밤까지 관련 영상과 뉴스를 지켜보며 잠을 설쳤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앞다퉈 우려와 비판을 담은 메시지를 발표했다.

북유럽 정치인들도 비판 대열에 동참했다. 스웨덴의 스테판 뢰벤 총리(사회민주당)는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이렇게 썼다. “큰 우려를 안고 워싱턴DC 사태의 전개 과정을 지켜봤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많은 의회 의원에게 지금 사태에 대해 큰 책임이 있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적 절차는 존중돼야 한다.”

덴마크의 예페 코포드 외무장관(사회민주당)은 역시 자신의 트위터에서 “워싱턴으로부터의 매우 심란하고 불쾌한 장면들. 미국 민주주의가 이번에 다시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의회 활동은 존중돼야 한다. 덴마크는 미국의 민주적 (권력) 이양을 지원한다. 나는 바이든 행정부와 일하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다”라고 썼다.

핀란드의 대통령과 총리도 각각 미 의회 난입 사태에 우려와 비판을 가했다. 사울리 니니스뙤 대통령(국민연합당)은 트위터 계정을 통해 “매 순간 워싱턴에서 새로운 불가능한 것들이 오고 있다. 믿기 어려운 민주주의의 악몽이 진행 중이다. 정당의 경계를 넘어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용기를 준다”라고 썼다. 산나 마린 총리(사회민주당)는 1월7일 성명을 내어 “유럽과 미국은 공통의 역사적 가치 기반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제 공격받았다. 우리는 민주적 절차를 교란하거나 자유로운 선거의 결과를 의문시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미 의회가 폭력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를 확정한 것은 좋은 일이다. 이는 예외적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주적 제도가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불평등, 기성 정당의 무기력, 소셜 미디어 파편화
이처럼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며 북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에 큰 충격을 던진 미국 의회 의사당 습격 사태가 2021년 벽두를 맞이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구조적 불평등의 위험에 대한 경고다. 지난 30년간 자본주의 고도화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번성 속에 많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한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사실이 되었다. 특히 미국에선 이 기간에 상위 1%와 하위 90% 사이의 자산·소득 격차가 크게 늘었고, 이는 트럼프 같은 포퓰리즘 정치가의 등장과 지지세 확산을 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둘째, 기성 정당들의 정책적 실패와 무기력에 대한 경고다. 특히 전후 사회적 합의와 복지국가 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중도 좌우의 기성 정당들이 1980년대 이후 정치사회 환경과 이데올로기적 지형 변화에 맞춰 자신들의 정책 노선을 변경,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지지 정당을 상실한 유권자 집단이 다수 창출됐다. 여기에서 중요한 정치적 대표의 간극(Representational Gap)이 발생했고, 이 유권자들은 ‘정치적 홈리스’와도 같은 처지가 되어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세력의 선동에 휩쓸릴 위험이 더욱 커져온 것이다. 그 결과 정당과 의회 등 민주적 대표 기관들이 물리적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도 커졌다.

셋째, 소셜미디어 시대에 벌어지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파편화 양상과 이에 따른 정치적 양극화 심화에 대한 경고다. 인터넷 발달에 따른 정보 공유의 활성화와 민주적 투명성 증가, 이를 통한 정치적 평등의 증진에 대한 낙관적 기대는 어느덧 거대 인터넷·미디어 기업에 의한 정보 독점과 흐름 왜곡, 나아가 무분별한 거짓 정보의 생산과 유통에 따른 극단주의 정치운동 득세 등에 대한 비관적 우려로 바뀌었다. 실제 트럼프의 집권 기간 내내 이런 현상이 강화됐다. 인종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그리고 극우단체 큐어논(QAnon) 같은 음모이론이 결합해 차별과 혐오의 확산은 물론 대통령선거 결과의 부정과 의회 공격 사태로까지 발전한 형국이다.

지금은 카이로스의 시간
이 문제들은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정치 양극화가 유독 심화한 미국에서 더욱 선명한 모습을 띠고 나타나지만, 2020년대의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성이 요구된다. 실제로 2020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엄격한 코로나19 방역 조처에 항의하는 극우 시위대 일부가 연방의회 의사당에 진입을 시도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면 비례대표 선거제도와 폭넓은 다당제 정당체계에 기반한 합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승자독식의 정치와 극단적 정치 양극화를 예방해온 북유럽에서도 최근 반이민, 반유럽연합(EU) 등을 내세운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괄목할 성장을 보여 우려를 낳았다.

그렇다고 비관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어쩌면 지금은 위기와 가능성이 교차하는 ‘카이로스’(Kairos·고대 그리스어로 위기와 동시에 큰 변화가 가능한 질적으로 중요한 시간을 뜻함)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사회정책 패러다임의 대전환, 극단주의를 예방하는 한편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참여를 보장하는 새로운 미디어·민주주의 정책 수립, 그리고 2020년대가 요구하는 정치적 대표 기제의 재구성과 혁신적 리더십 창출을 통해 오늘의 어둑한 불확실성과 위기의 시대를 건너가야 한다. 미 의회 의사당 습격 사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처와 더불어, 1월20일 취임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정책 향방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까닭이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한겨레21>과 함께해주세요
<한겨레21>은 후원자와 구독자 여러분의 힘으로 제작됩니다. 광고 수입이 급감하면서 저널리즘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독립적인 재정만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더 나은 사회를 제안하는 심층 보도를 이끕니다. <한겨레21>의 가치와 미래에 투자할 후원자를 기다립니다.
문의
한겨레21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후원
https://cnspay.hani.co.kr/h21/support.hani
구독 신청
http://bit.ly/1HZ0DmD 전화신청(월납 가능) 1566-9595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