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을 향한 열정, 정말 멋지지 않아요?”
2019년 11월 어느 날, 프로젝트 연구차 헬싱키 하까니에미에 있는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Opetushallitus)를 방문했다. 조기교육과 기초교육 총괄 책임자인 마르요 라사넨 박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핀란드 교육체제의 특징과 국가교육위원회의 역할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발표했고, 우리는 1시간 남짓 교육개혁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 “학습을 향한 열정–모든 사람은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도록 성장할 수 있다”는 국가교육위원회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학습을 향한 열정, 정말 멋지지 않아요?”라며 그가 순간 함박웃음을 띠고 물었을 때 나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핀란드 교육정책을 주관하는 고위 관료의 입과 표정에서 그런 표현이 나올 줄은 미처 예상 못했다. 교사 출신으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지닌 연구자이기도 한 그는 정말 끊임없이 배우고 다른 이들의 성장을 돕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는 듯싶었다.
핀란드 교육정책 거버넌스에 대한 놀라움은 당시 교육문화부, 교사노조, 직업학교학생연맹, 헬싱키대학 교사교육학과 등을 방문할 때마다 계속됐다. 마침 그 시점에 고등학교 새 국가교육과정이 공표되는 중요한 세미나가 열렸다. 리 안데르손(33) 교육장관이 교육과정 개정안이 갖는 의의와 현 정부의 교육개혁 방향 등에 관해 유려한 연설을 마친 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원형 탁자에 비스듬히 세운 무엇인가를 감싼 보자기가 보였다. 잠시 뒤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두 사람이 함께 보를 들어 올리자 파란색으로 깔끔하게 디자인된 두툼한 책자 두 권이 나타났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책자를 서로에게 증정했다.
400쪽 분량의 그 책이 바로 새 고등학교 국가교육과정이었다. 2년간 국가교육위원회가 주관해 교사, 학생, 학부모, 지방자치단체, 학교 네트워크 등 다양한 정책 이해관계자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지속적인 숙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작품이다. 특히 교사들은 교사노조, 과목별 교사모임, 학교 네트워크, 개별 교사 등 다층적 수준에서 교육과정 개정 작업에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참여한다. 이 때문에 교육과정이 위로부터 부과된 일방적인 규제라기보다, 우리가 함께 만든 유용한 학습 지침이자 도구라는 인식이 강하다. 국가교육과정이 공표된 뒤에는 다시 2년에 걸쳐 지역 교육과정 수립을 위한 과정이 진행된다. 헬싱키대학 야리 라보넨 교수는 이를 ‘끝없는 국가적 브레인스토밍’ 과정이라고 말했다.
무대 위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국가교육위원회 사무총장과 고등학생연합 대표였다. 그들은 각각 새 교육과정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과 의견을 담아 짧은 연설을 했다. 학생 대표는 교육과정 개정 방향에 기본적으로 찬성하면서도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의무교육 18살 연장안에 대해 학생들의 선택 사항을 의무로 돌리는 조처라며 일부 우려가 있음을 밝혔다. 국가교육위원회 사무총장과 고등학생연합 대표가 함께 국가교육과정을 발표한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말해줬다. 실제 고등학생연합 대표는 직업학교학생연합, 대학생연합, 응용과학대학학생연합 대표들과 함께 국가교육위원회 이사회에도 참석한다.
2001년 첫 PISA(국제학업성취도연구) 결과 발표 이래 교육혁신의 대안 모델로 떠오른 핀란드 교육을 떠받치는 것은 바로 참여적, 숙의적 정책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핀란드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 시야를 50년 전 핀란드로 확장해야 한다. 오늘날 핀란드 교육체제의 탄생을 가져온 정초적 개혁이 그때 일어났다. 바로 1960~70년대의 9년제 종합학교 제도로의 교육개혁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생 진로를 미리 결정하는 독일식 학교제도를 운영하던 핀란드는 7살부터 16살까지 모든 아이가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학업성취도 등과 상관없이 한 교실에서 배우고 생활하는 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보편적 교육 기회 보장은 전후 경제발전 속에 늘어가던 도시 중산층의 요구였다. 마침 스웨덴에서도 핀란드보다 앞서 비슷한 개혁이 실시됐다. 1960년대 초 뻬까 꾸시의 유명한 정책 팸플릿 <1960년대의 사회정책>이 출간되면서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새로운 사회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퍼졌다. 이에 1963년 핀란드 의회가 정부에 종합학교 도입 방향의 교육개혁안 마련을 권고했고, 정부는 위원회를 구성해 수년간 활동하면서 관련 개혁을 준비했다. 마침내 1968년 종합학교법이 제정됐고, 1970년대 단계적 시행을 거쳐 종합학교 제도가 정착됐다.
1970년대에는 교사 양성 시스템을 개혁해 교사 자격으로 석사학위 취득을 요구했다. 교사의 독자적 연구 역량이 강조됐고, 교사는 학생들이 호기심을 갖고 관련 학문과 현상을 탐구하도록 돕는 창조적 전문가로 재인식됐다. 특수교육 개념도 장애 학생을 위한 서비스만이 아니라 누구든 ‘특별한 필요’가 있는 경우 ‘특별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개념으로 전환됐다. 오늘날 핀란드에서 특수교육 서비스를 받는 학생은 30%에 이른다(1970년 5%). 나아가 1980년대부터 핀란드는 고등학교와 직업고등학교 교육과정을 개혁했고, 1990년대에는 직업고등교육기관으로 응용과학대학들을 설립했다. 1980~90년대에는 교육행정의 분권화와 자율화 흐름도 가속됐다.
핀란드는 1960~70년대 이래 단계적, 지속적 교육개혁을 했다. 이 과정에서 초·중·고 교육을 관장하는 국가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교육개혁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특히 역사적인 종합학교 교육개혁 이래 교육(개혁)의 중요성에 대한 정치적 합의와 높은 정책적 우선순위 부여가 흔들림 없이 유지돼온 점을 강조해야 한다. 북유럽의 후발 주자로서 사회 번영과 복지국가 실현의 초석으로서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깊이 뿌리내린 것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경쟁, 효율성, 표준화, 개혁 대상으로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 외부 통제 등의 원리에 기초한 글로벌 교육개혁 운동(GERM)의 높은 영향력에서 핀란드 교육이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한 하나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학자들은 글로벌 교육개혁 운동이 표방한 ‘교육혁신 제3의 길’과 구분해 핀란드 교육 모델을 ‘교육혁신 제4의 길’로 개념화한다.
어떻게 사회적 합의와 신뢰에 기반한 교육정책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미래지향적 교육개혁을 실행할 것인가? 5년마다 교육개혁의 밑그림을 그렸다 지우길 반복해온 민주화 이후 교육정책 거버넌스의 한계를 뛰어넘어 ‘정초적 합의와 개혁’을 실현할 전략적 리더십이 요청된다.
글·사진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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