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정도는 앨범 홍보할 마음이 있었고 육아를 도와줄 수도 있고, 일석이조 아닌가….”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에서 싱어송라이터 장범준은 KBS 예능 프로그램 (이하 ) 출연을 결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공교롭게도’ 계속 앨범을 만드느라 아이들이 잠에서 깨기 전에 나갔다가 잠들고 난 뒤에야 귀가했다던 그는 육아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고, “정신병 안 걸린 게 신기할 정도”라면서, 녹화를 마친 뒤 아내에게 꽃 한번 사다 줬다며 멋쩍게 웃었다. 장범준은 아이들이 여섯 살과 세 살이 되도록 육아를 제대로 하는 게 처음이라고 했지만, 이날 에서 남성 네 출연자를 묶은 키워드는 ‘딸바보’였다.
2박3일 이벤트 ‘아빠 육아’에 열광딸바보는 을 비롯한 가족 예능의 꾸준한 히트 상품이다. 딸이 있는 아빠는 누구나 딸바보가 될 수 있다. 육아라는, 날마다 반복되며 번번이 예상치 못한 고난이 닥치는 노동을 대부분 여성 배우자에게 떠맡긴 채 살아왔더라도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남성의 육아 동참을 그 자체로 기특하고 남다른 수고라 여기는 곳이기에, 아빠의 서투름은 엄마와 달리 귀여운 해프닝이 되고 이들의 성장은 드라마가 된다. 그리고 올해로 방송 7년째를 맞은 은 굳건히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지키는 중이다.
그래서 의 아빠와 아이들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함께 장난감을 사러 가서 서로 장난치고,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체험형 전시장과 놀이공원에서 멋진 경험도 한다. 이들은 어디서나 환대받으며, 대부분 조용하고 널찍한 자리가 이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비추는 따스한 세계는 지독한 기만이다. 유명인 남성 가부장만이 배려와 관용을 누릴 수 있는 이 세계는 카메라 앞에서만 잠시 존재하며 현실에서 대부분의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들에게는 굳게 닫혀 있다. 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해 허윤 부산 외국어대 교수는 “아빠가 육아를 담당하는 2박3일은 특별한 일일 뿐이고, 다시 주양육자는 엄마가 된다는 메시지”를 주며 “‘슈퍼맨 아빠’라고 하는 한국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부분도 있다”(, 후마니타스)고 분석한다. 문화연구자 손희정 역시 “가정 안에서 아빠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건 좋지만, 다시 또 어머니의 노동과 자리는 비가시화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상상해보자. 에서 고지용의 아들 승재와 심지호의 아들 이안이는 기차를 타고 설레며, 경주에 가면 “다보탑!” “석굴암!” “롤러코스터!”가 있다고 외친다. 현실이라면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는 어린이는 즉시 ‘민폐’로, 엄마는 ‘무개념’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이동국은 막내 시안이가 장난감 뽑기에 심부름 값을 대부분 써버리자 세 아이를 데리고 마트 시식 코너로 간다. 실제로 어떤 여성이 비슷한 행동을 했다면 ‘공짜 좋아하는 진상 엄마 목격한 썰’로 온라인 조리돌림을 당했을 것이다. 심지어 샘 해밍턴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첫째 윌리엄 때문에 카페 주인에게 둘째 벤틀리를 잠시 맡아달라고 한 뒤 윌리엄을 데리고 나가기도 한다. 만약 어떤 엄마가 이런 부탁을 했다면 어떤 비난이 쏟아졌을까?
어른이 편히 있을 권리, 아이가 입장할 권리‘노 키즈 존’(No Kids Zone)이 없는 의 세계는, 그래서 현실의 아동과 그 보호자가 설 자리를 더욱 축소하는 데 기여한다. 의 출연자들이 내는 소음은 볼륨을 줄이거나 채널을 돌림으로써 내 세계에서 치울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그럴 수 없고, 부모라 해도 언제나 아이를 완벽히 ‘컨트롤’할 수는 없다. (사계절)의 저자 김원영 변호사는 한국 사회에 팽배한 아동혐오에 대해 “아동의 귀여움은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에 머물지 않고 전국 단위의 ‘공적인 것’으로 소비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정반대로 ‘귀엽지 않은 아동’에 대한 거부와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계간 2019년 봄호)고 지적한다.
여성혐오 이슈와 함께 온라인 매체의 조회수 올리기에 종종 이용되는 아동혐오 관련 기사의 뜨거운 댓글난은 의 꾸준한 인기와 현실의 간극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잘못 키운 부모를 탓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에 숨어 퍼져나가는 아동혐오는 당연히 여성혐오와 직결되는데, 최근 네이버에서 6500개 넘는 댓글이 달린 ‘노 키즈 존’ 기사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 3개 역시 ‘맘충’ ‘엄마’ ‘빠순이’를 향한 것이었다.
지난해 11월, 동화작가 전이수군은 동생의 생일에 찾아간 레스토랑에서 출입을 거부당해 슬펐던 경험을 일기로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어른들이 조용히 있고 싶고, 아이들이 없어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생각한다.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 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최근 이 일기가 다시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되자 포털 사이트에는 악플이 줄을 이었고, 몇몇 ‘어른’들은 열한 살 어린이의 인스타그램까지 찾아가 훈계조의 댓글을 달았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노 키즈 존’은 일부 공간의 문제를 넘어 어느 곳에서도 어린이의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서로 확장되고 있다.
당신이 가져야 할 어른스러움사람이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해야 할 적절한 태도를 보여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에 등장한 한 여자 어린이다. 어린이를 위한 케이크 경연대회장에 간 축구선수 박주호의 세 살배기 아들 건후는 이 참가자의 케이크에 장식된 크림을 문지르고 만다.
그러나 이 어린이는 짜증 내거나 경계하는 대신 “건후야, 하고 싶어?”라고 침착하게 물은 뒤 재료로 쓰던 포도를 하나 건넨다. 그리고 아직 말이 서툰 건후가 옆에서 떠드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새로운 세상과 부딪히며 배워가는 존재에게 약간의 관용과 인내, 한때 울고 떼쓰고 싸고 토하는 아이였던 우리 어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어른스러움’이다.
최지은 칼럼니스트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1천원이라도 좋습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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