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상하이파 공산당 쇠락엔 그의 죽음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유학생이 연대한 혁명단체들 이끈 최팔용

조선 사회주의운동 궤적 그리고 요절한 혁명가
등록 2019-03-20 11:15 수정 2020-05-03 04:29
조선 사회주의운동 개척자인 최팔용. 임경석 제공

조선 사회주의운동 개척자인 최팔용. 임경석 제공

최팔용(崔八鏞)은 2·8 독립선언의 지도자였다. 3·1 혁명의 도화선이라 평가받는, 재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1919년 2월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유학생학우회 총회의 단상에 올라 유학생 수백 명을 지휘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2·8 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 서명

현장 모습을 전하는 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받치는 감격과 눈물 섞인 목소리로 집회를 이끌었다. 그는 독립선언서의 수석 서명자이기도 했다. 그날 배포된 선언서에는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 11명의 이름이 적혔는데, 맨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해 1월6일께부터 시작된 준비 과정도 최팔용이 총괄했다. 보기를 들어, 선언서 집필을 담당한 이광수에게 중국 상하이 망명을 지시한 이도 그였다. 이광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은 선언서를 짓는 것이었는데, 정성과 재주를 다해 밤새워 그 일을 했다고 한다. “2월 초하룻날 잔설은 아직 간다구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뜰 앞을 가린 채로, 무서운 간토 폭풍이 시가지를 훑고 지나가던 밤”이었다.

바람 소리에 유리창이 덜컹거릴 때마다 순사 옆구리에 차는 패검 소리가 아닌가 하여 몇 번이나 작업을 중단했다. 마침내 원고를 완성했을 때, 최팔용이 찾아와서 상하이로 피신할 것을 제안했다. 내부도 중요하지만 외부도 중요하니, 선언서를 가지고 외국으로 나가라고 종용했다는 것이다. 선언서 서명자들의 역할 배분 같은 중요하고도 은밀한 일을 최팔용이 관장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 관헌들이 보기에도 그는 죄가 컸다. 그는 재판정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2·8 독립선언으로 공판에 회부된 사람은 9명인데, 그중 최팔용은 서춘과 함께 나란히 징역 9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최팔용이 큰 영향력을 가졌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립선언이 있기 몇 년 전부터 그는 도쿄 조선유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1917년 2월부터 편집부 부원으로 일했고, 그해 9월 책임이 더욱 무거워져서 편집부장으로 선임됐다. 편집부 소임은 유학생회 기관지 (學之光)을 펴내는 일이었다. 1914년 4월 창간된 이 잡지는 격월간으로 기획됐지만 실제로는 연 2∼4회 발간됐다. 최팔용이 편집부에 있는 동안에는 제12호(1917년 4월)부터 제17호(1918년 8월)까지 모두 6개호가 나왔다. 직접 글도 썼다. 자신의 본명이나 ‘당남인’(塘南人)이라는 필명으로 다섯 꼭지의 기사를 썼다. 당남은 그의 아호였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남당리’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그의 외모와 재능도 한몫했다. 최팔용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던 최승만은 최팔용을 가리켜 “키가 크고 큰 몸집을 가진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함경도 출신으로 허우대가 좋고 유학생들의 리더 격이었다고 회고한 글도 있다. 게다가 그는 웅변도 잘했다. 1918년 4월13일, ‘각 대학 동창회 연합 현상(懸賞) 웅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최팔용이 1등상을 받을 정도였다.

이날 그는 ‘대세와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이 설령 망했더라도 영구히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설혹 융성한다 하더라도 역시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역사를 보라고 환기했다. 망국 폴란드는 오늘날 독립했고, 러시아 제국은 쇠망 상태에 처했음을 지적했다. 끝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종결될지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즈음 청년은 마땅히 자신의 의무를 다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마무리했다.

팔용이 수감됐던 일본 도쿄 스가모감옥의 구조. 임경석 제공

팔용이 수감됐던 일본 도쿄 스가모감옥의 구조. 임경석 제공

일본 형무소 출소 뒤 조선 명사로

합법 공개 집회였기에 에둘러서 표현했지만, 조선 멸망은 영구적인 게 아니므로 전쟁 종결을 맞아서 청년은 마땅히 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8 독립선언을 예감케 하는 격렬한 연설이었다.

유학생들을 이끄는 지도적 역량은 무엇보다 그의 비밀결사 경력에서 나왔다. 최팔용은 신아동맹당이라는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1916년 결성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단체였다. 조선, 중국, 대만 출신 유학생들이 각각 자국의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연합해서 만든 기구였다. 이 중 조선인 구성원은 18명이었다. 의지가 굳고 조국을 위해 한번 죽음도 불사할 만한 사람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2·8 독립선언의 동지인 김도연도 같은 멤버였다. 구성원 가운데 절반쯤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 뒷날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중핵을 이루기도 했다. 장덕수, 김철수, 김명식, 홍진의 등이 그 보기였다.

2·8 독립선언 이듬해인 1920년 3월26일, 최팔용은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다. 도쿄 스가모감옥 문을 나섰다. 뒷날 사상범을 주로 수용하던 형무소로 유명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A급 일본인 전범들을 처형한 장소로 이름난 곳이었다. 최팔용은 귀국길에 올랐다. 2·8 독립선언의 지도자였던 만큼 그의 동정은 언론 매체의 관심 대상이 됐다. 열차 편으로 경성에 도착해 닷새간 체류했다가, 다시 경성발 열차로 귀향하는 일정을 일간신문들은 낱낱이 보도했다. 그는 조선 사회의 명사가 되어 있었다. 고향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열차가 함흥역에 도착했을 때 환영객 50~60명이 역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날 저녁에는 만찬에 초대하려는 지인들의 권유 때문에 귀향 일정을 하루 미뤄야 했다. 그뿐인가. 다음날 4월25일, 버스 편으로 고향 홍원으로 출발할 때도 전송객 수십 명이 그를 둘러쌌다.

최팔용은 출옥하자마자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이제는 학생운동이 아니라 민중운동이었다. 맨 먼저 착수한 조직 대상은 청년층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 5월15일에는 홍원청년구락부 결성에 참여했다. 홍원군 내 11개 면의 청년들에게 웅변회, 운동회, 강연회를 여는 일을 본분으로 삼는 단체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청년단체를 결성한 게 귀향한 지 불과 20일 만의 일이었다. 옥중에서부터 이미 출감 이후 진로를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외국 망명지의 사회주의자들과 결합

그가 염두에 둔 향후 진로는 바로 사회주의운동이었다. 1920년 가을 경성에서 사회혁명당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 조직에 참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단체였다. 그 멤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가자 김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설립 당시 구성원은 약 30명이었는데, 중심인물들은 일찍이 도쿄 유학생 시절에 조직했던 비밀단체 신아동맹당의 당원이었다. 최팔용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수, 홍진의, 김명식, 정노식 등이 그러했다. 이 비밀단체는 이듬해 더욱 확대됐다. 외국 망명지의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해 고려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단체는 본부를 상하이에 뒀기 때문에 통칭 ‘상하이파 공산당’이라 했다.

최팔용과 그 동지들은 합법·비합법 운동을 결합하는 방침을 굳게 지켰다. 3·1 혁명 이후 총독부가 허용한 이른바 문화정치 공간을 활용하는 정책이었다. 그 공간 속에서 각계각층의 전국 규모 합법 대중단체를 조직하는 데 노력했다. 전조선청년회연합회, 조선노동공제회 등의 단체는 그 소산이었다. 그뿐인가. 합법적인 사회주의 선전 기관을 세우는 일에도 진출했다. 최팔용은 잡지 의 주간을 맡아, 를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매체로 활용하려 했다. 이 노력은 큰 성과를 올렸다. 사회주의 확산 속도와 범위가 해가 다르게 늘어났다. 요컨대 최팔용의 출옥 뒤 행보는 3·1 혁명 직후 조선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확대되는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표상과 같았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다. 어느 날 일간신문에 최팔용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가 떴다. 1922년 11월4일치 신문이었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최팔용씨는 그제 2일 오후 10시경에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면 남당리 자택에서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씨는 성질이 중후 순직한 인격자로 사회의 촉망이 많았으며, 향년이 32세인데, 일반 유지들은 그의 부음을 듣고 사회의 유망한 청년 하나를 잃어버렸다 하여 매우 애석히 생각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며, 시내 종로 6정목에 유숙하고 있는 그의 자녀 삼 남매는 이 놀라운 부음을 듣고 어제 아침에 홍원으로 급행하였다.” 

32살 청년 떠나니 비밀결사도 힘 잃어

사망 일시와 장소, 원인이 밝혀져 있다. 1922년 11월2일 오후 10시께 함경남도 홍원 자택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요절이었다. 1891년생이므로 향년 32살에 지나지 않았다. 가족에 관한 단편적 정보가 눈에 띈다. 경성 종로 6정목에는 어린 자녀 삼 남매가 머물렀다고 한다. 최팔용은 홍원과 경성을 오가기 위해, 또 어린 세 자녀의 교육을 위해 아마도 경성 시내에 살림집을 하나 사두었거나 임대했던 것 같다.

가장 눈에 띄는 정보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것이었다. 유망한 청년을 잃었다는 애석함과 애도의 심리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의 부재는 상하이파 공산당 세력이 부진해진 한 원인이 됐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없었다면 그가 몸담은 비밀결사가 약화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이광수, ‘상해의 2년간’, 4-1, 29쪽, 1932년 1월.
2. ‘소식’, 17, 78쪽, 1918년 8월.
3. 姜德相 編, 26, 東京, みすず書房, 9쪽, 1967.
4. ‘中第274號, 新亞同盟黨組織ニ關スル件’, 大正6年(1917)3月14日, 1~12쪽.
5. ‘최팔용씨 迎送’, 1920년 5월2일치 4면.
6. ‘崔八鏞氏’, 1922년 11월4일치 3면.
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1천원이라도 좋습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후원계좌 하나은행 555-810000-12504 한겨레신문 *성함을 남겨주세요
후원방법 ① 일시후원: 일정 금액을 일회적으로 후원 ② 정기후원: 일정 금액을 매달 후원 *정기후원은 후원계좌로 후원자가 자동이체 신청
후원절차 ① 후원 계좌로 송금 ② 독자전용폰(010-7510-2154)으로 문자메시지 또는 유선전화(02-710-0543)로 후원 사실 알림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