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사회주의자 다카쓰 마사미치(高津正道·32)가 조선을 방문했다. 1925년 4월15일이었다. 그날 저녁 7시에 열차 편으로 경성역에 도착했다.
그는 초창기 일본공산당의 손꼽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 재학 중 사회운동단체 효민회 조직에 앞장섰고, 그 단체를 기반으로 비밀결사 공산당을 결성했다. 1921년 11월에는 ‘육군대연습’이라는 대규모 군사훈련에 즈음해 일본군 장병 앞으로 ‘공산당 본부’ 명의의 ‘상관에게 불복하라’는 인쇄물을 발송함으로써, 관계자 40명이 일제 검거를 당했다(효민공산당 사건). 그 멤버 다수는 1922년 일본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했는데, 다카쓰도 물론 그 속에 있었다. 그는 일본공산당의 중심인물로 떠올랐고, 효민회는 제1차 일본공산당 원류의 하나로 간주됐다.
다카쓰의 조선 방문은 식민지 통치 권력의 경계를 받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신경 예민한 경찰 당국의 가슴만 덜렁거리게 만들어”놓았다고 한다.1 경찰은 그의 행동을 줄곧 감시했다. 이동할 때마다 미행을 붙였으며, 그의 언행에 관한 정보 문서를 날마다 작성했다.
그의 조선 방문을 위험한 것으로 단정하는 세력도 있었다. 일본인 극우집단인 국수회 경성지부가 그랬다. 그 단체 회원들은 비밀리에 대책을 논의했는데, 그중에는 다카쓰를 살해하는 모의도 포함됐다. 조선총독부 경찰 당국도 이 정보를 입수했다. 경찰은 양측 동향을 더욱 면밀히 주시했다.
그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조선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일본공산당이 1922년 강령 이래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일관되게 지지해왔기 때문이다. 조선 언론 매체는 그의 동정을 크게 다뤘다. 그는 이번 방문 목적이 사회주의 운동 관계가 아니라 개인적 용무에 있다고 말했다.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동무들도 있고, 수년 전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할 때 통과한 적도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여유 있게 놀기 위해 왔노라고 기자들에게 밝혔다.2
시기가 공교로웠다. 전국 단위의 대규모 대중집회가 속속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해 4월15~17일에는 전조선기자대회가, 20~21일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소집돼 있었다. 그뿐인가. 형평사 전국총회, 형평사 창립 2주년 기념대회, 사회주의자동맹 발기대회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상경한 언론인, 노동자·농민운동, 청년운동, 형평운동 대표자들로 서울 시내 모든 숙박시설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혁명적 열기가 서울 시내를 휘감고 돌았다. 신문 지면에는 각종 대회로 이뤄진 거센 파도 속에서 조각배를 탄 일본 경찰이 ‘금지’라고 적힌 노에 의지해 위태롭게 항해하는 모습이 그려질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카쓰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의 조선 방문은 개인 용무를 넘어 뭔가 추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뤄진 거라고 생각했다.
”다카쓰 마사미치의 조선 체류 기간은 길지 않았다. 4월15일부터 24일까지 도합 9일간이었다. 이 기간에 다카쓰는 바삐 움직였다. 수십∼수백 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조선기자대회를 방청하고(16일), 동대문 밖 상춘원 야외에서 열린 기자대회간친회에 참석했다.(17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베풀어준 환영회에 참석하고(17일), 민중운동자대회를 참관하러 갔으며(20일), 파고다공원에서 조선의 여러 사상단체 간부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21일)
다카쓰의 조선 방문 일정에 시종 동행한 사람이 있었다.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 이헌(33)과 유학생 안광천(28)이다. 두 사람은 다카쓰의 측근과 같은 역할을 했다. 도쿄에서 서울로 가는 여정에 동행했고, 다카쓰의 서울 체류 중에도 이헌은 7일 이상, 안광천은 5일 이상 일정을 함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안광천은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다카쓰의 귀환 여정에도 동행했다.
서울에 머무는 중에 다카쓰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연쇄적으로 사적 만남을 했다. 신철(24)·정종명(29) 부부는 특별히 친밀했다. 서울 체류 9박 가운데 여섯 밤을 신철의 살림집인 관훈동 112번지에서 묵을 정도였다. 사실상 숙소라고 일컬어도 과장이 아니었다. 신철은 도쿄 메이지대학 유학생 출신으로서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내막에 밝았다. 또 국내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최근 1~2년 전에는 국제당 조선총국의 내지부 위원이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냈으며, 북풍파 공산그룹의 지도적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 외에 다카쓰가 만나본 조선인 사회주의자 중에는 북풍파 인물이 많았다. 북풍파 공산그룹의 지도자인 김약수(28)를 비롯해 마명, 김종범, 김장현, 손영극, 송장복 등이 다카쓰 주위를 맴돌았다.
다카쓰가 회견한 사람 가운데 이채로운 이는 서울파 공산그룹의 요인인 이정윤(28)이었다. 다카쓰는 그와 회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렵게 성사된 회견 자리에서 다카쓰는 조선 방문의 내밀한 목적을 꺼냈다.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을 위해 “일체를 희생해 합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3 다카쓰는 자신의 제안을 서울파 공산그룹 집행부 내에서 논의에 부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동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이 유럽에 비하면 초창기이지만, 그런 만큼 발전 여지가 넓다고 봤다. 조선의 전도유망한 사회운동 상태를 시찰하고 그 미래를 개척하는 데 노력하는 것은 국제주의자로서의 본분이라 생각했다.
서울 체류 중 문제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4월21일이었다. 다카쓰 마사미치의 동정을 감시하던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의 사찰 기록을 보자.
21일. 두셋 사회주의자로부터 조선 사정을 청취했을 뿐. 비가 내렸으므로 오전 중에는 외출하지 않음. 오후에 이헌(李憲)과 함께 각 사회주의 단체를 역방함.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 가서 표면으로는 ‘다카쓰 입경 기념’이라며 각파 간부와 사진을 촬영함. 기념촬영에 관한 분요(紛擾)가 있음.4
4월21일 오전 중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다카쓰는 오후에야 외출했다고 한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비는 “20일 밤부터 21일까지 계속하여 내렸는데, 21일 아침 10시까지의 우량은 경성이 2말3되8홉”이었다.5 남도와 북도에 걸쳐 전 조선에 고루 내렸고, 봄 가뭄을 일거에 해갈한 반가운 비였다.
오후에는 날이 갰다.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눈에 띄는 이벤트가 있었다. 다카쓰 마사미치의 서울 방문을 기념하는 단체사진 촬영이다. ‘각파 간부’가 모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일까. 경찰의 사찰 기록에는 그 명단도 기재돼 있다. 일본에서부터 다카쓰와 동행했던 측근(이헌, 안광천), 북풍회(정운해, 김장현, 신철, 정종명, 마명), 화요회(홍증식), 상해파 공산당(신일용, 유진희), 서울청년회(김사국, 이정윤, 박형병) 등이 그들이다. 이 외에도 성명을 미처 식별하지 못한 참석자 4~5명이 더 있었다.6 어쨌거나 각파 공산그룹을 망라했다는 평을 들을 만한 면면이었다.
그런데 ‘기념 촬영에 관한 분요’가 있었다는 언급이 눈길을 끈다. 도대체 어떤 소란이 있었을까? 습격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오후 5시였다. 사진 촬영이 끝난 지 1~2시간 만에 다카쓰가 묵던 관훈동 112번지 신철의 집을 두 청년이 몽둥이를 들고 습격했다. 화요회에 속한 무명의 청년들(황성하, 임석남)이었다. 마침 집 안에는 사진 촬영에 참가했던 김장현과 신철이 머물러 있었는데, 그들은 부엌 식칼을 들고서 침입자들과 대치했다. 경찰이 곧 출동했기 때문에 별다른 신체 부상이나 집기 훼손 같은 피해는 없었다.
습격자들이 격앙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기념 촬영의 배후에 불순한 음모가 숨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현실은 분열돼 있었다. 둘로 첨예하게 나뉘었다.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소집 문제가 현안이었다. 그 대회를 소집한 화요회와 북풍회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국대회를 성공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에 반해 서울청년회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 회합을 소집해 막상막하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기념 촬영은 이 현실을 기망하는 행위였다. 각파 공산그룹의 간부를 한자리에 모아 사진을 찍음으로써 조선 사회주의 운동이 마침내 하나로 통합된 듯이 가장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거짓 증거가 필요할까. 국제당에 대한 외교 때문이었다. 국제당을 속여서 주도권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소란은 더 계속됐다. 사진 촬영 다음날인 4월22일 서울청년회 열성자 50여 명이 회합했다. 이들은 자기네 구성원 5명이 기념 촬영에 응한 것은 양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제3의 음모에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 이튿날에는 화요회와 북풍회에 속하는 4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두 단체는 민중운동자대회 개최에 서로 연대했기에 자연스레 합동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사진 촬영에 연관된 사람들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다카쓰도 참석했다. 사진 촬영의 동기, 경위 등에 관한 보고가 이뤄졌고 다카쓰의 발언이 뒤이었다. 그는 사과했다. 사진 촬영 건으로 이와 같이 분규가 일어난 점에 매우 두렵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자기는 조선 사회운동의 분규가 이처럼 극단화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됐으며, 그러므로 사진 촬영을 기획한 것은 조선 상황을 잘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자신의 불민함이라고 발언했다.
1925년 4월17일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 출범한 직후였다. 공청 중앙집행위원이던 권오설의 회고에 따르면 그 사과는 수용됐다. 조선에서는 이미 공산당과 공청의 계선이 분명히 정립됐으므로, “군이 만일 공산주의자일 것 같으면 … 유기적 연락이 없이 표면만 보고서 함부로 조선운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운동선을 교란함인즉 깊이 주의하여달라”는 경고 메시지가 전달됐다.
다카쓰 마사미치의 조선 방문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사건의 그늘에는 식민지 조선의 혁명운동을 바라보는 제국주의 본국 사회주의자들의 내면의식이 반영돼 있다. 식민지 혁명의 성패는 제국주의 본국 혁명의 그것에 좌우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북풍파 공산그룹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있었음에도 눈길이 간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1. ‘高津 씨 귀국 ’, < 동아일보> 1925년 4월25일
2. ‘漫遊 에 겸사겸사 ’, < 동아일보> 1925년 4월19일
3. 京畿道, ‘京高秘第 1827 號 ノ 2, 特別要視察人入鮮 ニ 關スル件’, 1925년 4월25일, 10 쪽 , <檢察事務 에 關 한 記錄 2>, 국편 한국사 DB, https://db.history.go.kr/
4. 위의 글, 5~6 쪽
5. ‘ 穀雨來 ! 전국 해갈’, < 조선일보> 1925년 4월22일
6. 경성종로경찰서장, ‘京鍾警高秘第 4621 號 ノ 1, 各派主義者 ノ首領排斥ノ件’, 1925년 4월23일, <檢察事務 에 關 한 記錄 2>, 국편 한국사 DB, https://db.history.go.kr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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