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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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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텍이 보르네오섬에 갔다면…

정체성 혼란 겪는 ‘인간화한’ 오랑우탄

인간-유인원 공진화하는 공간을 꿈꾸다
등록 2018-05-09 22:34 수정 2020-05-03 04:28
인류학자 린 마일스는 오랑우탄 ‘찬텍’을 키우며 수화를 연구했다. 미국 채터누가 테네시대학 제공

인류학자 린 마일스는 오랑우탄 ‘찬텍’을 키우며 수화를 연구했다. 미국 채터누가 테네시대학 제공

오랑우탄은 우산을 쓰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책가방으로 머리를 덮는 것처럼, 나무 위에 매달려 나뭇잎을 쓰고 있었다.

보르네오섬 탄중푸팅국립공원의 열대우림. 세이코니어강 상류 캠프 리키의 숲에서는 사람과 어울려 사는 오랑우탄이 있다. 동물원이 아니다. 구조된 오랑우탄을 야생 방사했고, 찾아오는 개체에게 먹이를 주면서, 인간과 오랑우탄은 독특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어떤 오랑우탄은 야생 방사로 먼 길을 떠나 완전한 야생이 되었지만, 어떤 오랑우탄은 인간과 이웃한 반야생 동물이 된 것이다.

오랑우탄이 우산을 쓰는 모습은 이 동물이 도구를 쓴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양한 굵기의 나뭇가지를 이용해 열매와 곤충을 파먹고, 나뭇잎으로 머리를 덮거나 판초를 만들어 뒤집어쓴다. 새순이 막 돋아난 나무에 매달린 오랑우탄은 나뭇잎이 작아 제대로 얼굴도 가리지 못했다. 물방울이 ‘똑’ 하고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오랑우탄의 엄마 갈디카스

오랑우탄의 나라에 유전자 97%를 공유하는 인간이 들어온 것은 1971년이었다. 제인 구달의 침팬지, 다이앤 포시의 고릴라에 이어 오랑우탄을 세계에 데뷔시킬 여성 과학자를 세계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비루테 갈디카스였다. 사방 수십km에 민가 하나 없는 정글의 심장부. 배를 끌고 도착한 갈디카스는 우랑우탄의 나라에 통나무집을 짓고 오랑우탄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보르네오섬의 열대우림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재식농업(플랜테이션)을 위해 숲에 불을 질러, 오랑우탄은 둥지 지을 나무를 잃고 있었다. 수많은 오랑우탄 미아가 숲을 헤맸고, 애완용으로 사로잡혀 쇠사슬에 목이 묶인 채 끌려다녔다. 어미 잃은 오랑우탄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갈디카스는 과학자에서 보전운동가로 삶의 방향을 바꿨다. 오랑우탄의 엄마가 되었고(실제 오랑우탄을 길렀다), 방사한 오랑우탄에게는 먹이를 주었으며, 오랑우탄재단을 만들어 보르네오섬에 눌러앉았다.

갈디카스가 몰고 온 변화는 탄중푸팅국립공원과 캠프 리키를 독특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오랑우탄은 인간을 개의치 않는다. 관리자는 하루 두 번 먹이를 주고, 연구원은 무언가를 적고, 관광객은 사진을 찍을 뿐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호기심에 오랑우탄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온다. 야생에 살지만 탄중푸팅의 오랑우탄은 인간과 교류한다. 오랑우탄의 문화와 인간의 문화가 접변한다.

캠프 리키를 떠나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저쪽에서 오랑우탄 한 마리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어떤 오랑우탄도 우리를 해치지 않았으므로 코앞에 올 때까지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그때 여행 안내자가 내 팔을 잡아챘다. “조심하세요. 큰 수술을 받고 나서 예민해졌어요.” 하마터면 오랑우탄과 뒤엉킬 뻔했다.

손발 네 개를 쓰며 톱질하는 시스위

톱질하는 오랑우탄 ‘시스위’. 모방 능력이 타고난 유인원은 곧잘 인간의 행동을 배운다. 영국 방송 《BBC》 화면 갈무리

톱질하는 오랑우탄 ‘시스위’. 모방 능력이 타고난 유인원은 곧잘 인간의 행동을 배운다. 영국 방송 《BBC》 화면 갈무리

‘선착장 죽돌이’라는 이 오랑우탄의 이름은 ‘시스위’였다. 내가 이 오랑우탄을 기억하는 이유는 얼마 뒤 영국 방송 《BBC》 다큐멘터리에서 봤기 때문이다. 시스위는 선착장에서 톱질을 하고 있었다. 쓱싹쓱싹. 두 발로 나무의 양쪽 끝을 붙들고 두 손으로 번갈아 톱을 밀어댔다. 쓱싹쓱싹. 손발 네 개를 자유롭게 쓰니까 톱질이 더 잘되는 것 같았다.

캠프 리키의 어떤 오랑우탄은 배를 타고 손으로 노를 젓는다. 우산 쓰는 것을 이들이 자연에서 터득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배운 도구 행동이다. 오랑우탄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본능적으로 모방하기 때문이다. (보르네오섬 다른 지역의 오랑우탄은 나무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듯한 모습이 사진으로 포착되기도 했다. 과학적 연구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맨 처음 인간과 개가 만났을 때도 이런 풍경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만5천 년 전 혹은 3만 년 전(둘 중 무엇이 맞는지 논란이 있다), 개는 인간사회로 들어왔다. 적극적으로 같이 사냥했을 수도 있고, 마을 주변에서 잔반을 처리하며 포식자가 꼬이지 않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점차 인간과 개의 감정적 거리는 가까워졌고, 개는 인간의 행동을 배우고 인간은 개에게 영향받았다. 개는 늑대와 달리 입을 벌려 웃을 줄 안다.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는(눈치 보는) 본능이 있다. 한 연구는 개가 인간과 동료 개와 같이 있을 때, 인간의 얼굴에 더 신경 쓴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이 성향은 개의 유전자에 심어졌다. 개와 인간은 ‘공진화’(함께 진화하다)했다.

파국을 예정한 동물실험

시스위보다 더 유명한 오랑우탄이 있다. 고향은 미국 애틀랜타의 여키스국립영장류센터이며, 이름은 ‘찬텍’이다. 시스위가 야생의 땅에 살며 자기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인간과 접촉했다면, 찬텍은 인간 땅에 태어나 아예 인간 가족에게 입양됐다.

찬텍이 태어난 1977년은 유인원을 대상으로 수화 실험이 열기를 띨 때였다. 침팬지·고릴라·보노보에게 한 수화 교육이 성공했고, 이번에는 오랑우탄 차례였다. 오랑우탄은 나머지 세 유인원과 좀 달랐다. 세 유인원은 무리를 짓고 성별·나이에 따른 분업 등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한다. 언어가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다. 반면 오랑우탄은 숲의 단독자에 가깝다. 비루테 갈디카스가 면밀히 관찰해 세상에 알렸듯, 오랑우탄은 보통 혼자 다니며 번식과 놀이 등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다른 개체와 어울린다.

그렇다면 오랑우탄은 수화를 배울 수 있을까? 선행 연구의 침팬지들과 마찬가지로 찬텍은 태어난 지 9개월째부터 인간과 함께 자랐다. (인간의 언어는 가족생활을 하면서 습득된다.) 찬텍의 엄마는 젊은 여성 인류학자 린 마일스였다. 마일스는 찬텍의 기저귀를 갈고, 우유병으로 젖을 먹이고, 어린이가 되자 아이스크림가게에 데리고 갔다. 찬텍은 미국 테네시주 채터누가시 테네시대학의 한 사택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150여 개의 미국 수화를 배웠다. 그러나 9살 때, 찬텍은 모든 유인원 수화 연구자들이 맞닥뜨리는 문제에 부닥쳤다. 찬텍의 몸집이 커졌고, 캠퍼스 마스코트로 이 동물을 귀여워하던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대학 도서관에서 찬텍이 한 여학생을 공격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찬텍은 여키스국립영장류센터로 소환됐고, 결국 애틀랜타 동물원에 보내진다.

어떻게 보면, 찬텍은 괴물이었다. 인간도 아닌 오랑우탄도 아닌 반인반수. 인류학계에 휘몰아친 1970~80년대의 수화 연구 열풍은 이런 유인원을 20마리 이상 탄생시켰다. 그들은 어정쩡한 삶을 살다가 지금 연구실의 좁은 시멘트방에서, 동물보호소에서 아픈 과거를 삼키며 죽을 날을 기다린다.

애틀랜타 동물원에 들어온 찬텍도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다른 동료 오랑우탄을 보고 수화로 ‘오렌지 개’라고 말했다. 린 마일스가 애틀랜타 동물원으로 찬텍을 보러 가면, 울타리 너머 찬텍은 수화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린, 차 가져와, 집에 가자.”(Mother Lyn, Get the car, Go home.)

나는 린 마일스와 몇 번 전자우편을 주고받았다. 그는 자책감에 빠져 있었다. 마일스는 찬텍을 동물원에서 꺼내 ‘인간 엄마’를 볼 수 있는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하는 것이 찬텍에게 속죄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소박한 구상을 말했다. 찬텍 같은 인간문화의 세례를 받은 ‘인간화한’ 유인원을 위한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른바 ‘판 호모 문화’를 위한 공간이다. 인간과 오랑우탄은 같은 사람과(Hominidae)의 동물이다. 사람과 동물은 눈을 맞추고, 손을 자유롭게 쓰고, 도구를 제작하며, 석기시대를 거쳤거나 석기시대를 통과 중인 비슷한 동물이다.

인간과 유인원 교통하고 접변하고

사실 판 호모 문화는 지금 보르네오섬의 탄중푸팅국립공원에서 번지고 있다. 톱질을 배우는 시스위, 노를 젓는 오랑우탄, 길 잃은 새끼 오랑우탄에게 젖병을 물리는 연구원 등 인간의 문화와 유인원의 문화가 오가며 접변한다. 두 종의 접경지대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행동 양식이 개의 시간만큼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오랑우탄이 탄생할 것이다.

찬텍은 2017년 8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삶의 4분의 1을 인간으로 살았고, 4분의 3을 동물로 살았다. 린 마일스는 제인 구달처럼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가 아니었다. 판 호모 문화를 꿈꾸며 세운 ‘찬텍 재단’은 변변한 기부금을 모으지도 못한 채 사라졌고, 찬텍도 언론에 짧은 기사를 남기고는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남종영 편집장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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