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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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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 미룰 수 없는 일

약자 처지 이해하기 시작한 여든 중반 아버지…

자식과 맛있는 것 먹으며 장례 절차 고민
등록 2018-04-27 01:07 수정 2020-05-03 04:28
프랑스 니스 해변에서 개와 함께 햇볕을 쬐는 노인들. 로이터

프랑스 니스 해변에서 개와 함께 햇볕을 쬐는 노인들. 로이터

팽팽 놀다가 시험 전날 밤 엄마 눈치 봐가며 드라마까지 챙겨본 뒤에야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지구가 멸망했으면 바라곤 했다. 늘 그랬다. 공부든 일이든 공과금 납부든 내일 할 수 있는 일이면 그냥 내일 하자, 쪽이다.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서 그런가. 이러다가 옷장 정리도 찬장 정리도 환갑 지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젠장, 내일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애 키우는 거, 그리고 부모 챙기는 거. 너무 빨리 자라버리고 너무 빨리 늙어버려서다. 둘 사이에 끼어 40대를 관통하면서 깨달았다. 다른 건 몰라도 돈의 경우, 자식에겐 쓸까 말까 고민된다면 쓰지 않는 게 낫고 부모에게는 쓰는 게 낫다. 애한테 썼다가는 본전 생각에 성질이 나게 마련이고(특히 학원비나 교재비, 각종 활동비 같은 거), 부모에게 안 썼다가는 두고두고 마음이 편치 않다(묻지도 않았는데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왜 자꾸 일깨우는 거야).

지난달 아버지가 갈비탕을 먹자고 하셨다. 가끔 같이 드시는 박 사장님하고 드시지 그러냐고 했다. 그 친구 겨울에 죽었다, 아버지가 무심히 말했다. 그 며칠 뒤에는 내가 도다리쑥국을 먹자고 했다. 안 그래도 지하철 타고 멀리 나왔는데 근처 사는 친구가 전화를 안 받아 점심을 어쩔까 하던 중이었단다. 나랑 약속을 잡으며 아버지는 덧붙였다. 친구에게 뭔 일 났으면 자식이든 누구든 전화를 다시 해줬을 텐데 연락 없는 거 보니 별일은 아닌 모양이라고.

팔십 중반인 아버지는 몸도 마음도 정정한 편이다. 해가 바뀌거나 계절이 바뀌면 등산 친구, 국밥 친구가 하나둘 준다. 덕분에 “한창때는 껴주지도 않던 ‘쫌팽이’나 ‘짠돌이’도 두 다리 멀쩡하고 살아 있으면 그러모아 논다”는 ‘실존적 자부심’이 있다. 가끔 내가 친구 흉을 보면 “너 그렇게 까칠하게 굴다가는 나중에 늙어 친구 하나도 안 남는다”고 충고도 해준다. 아버지는 꽤 괜찮은 노인네가 되었다.

직장 상사를 제외하고는 평생 ‘갑’에 가까운 처지로 살아왔으나, 언제부터인가 약자들의 처지를 이해한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주민. 간혹 식당 같은 데에서 무시당해도 내가 노인이라서 당연하다, 서빙하는 이들이 힘들어서 그렇다, 살피고 조심한다. 할배 냄새 안 나게 스킨도 챙겨 바른다. 나에게 투표권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지지 후보가 같거나 차선 후보조차 겹친 적이 없지만, 아버지는 지난 대선에서 처음으로 ‘기권’을 했다. “추운 겨울에 촛불 들고 고생한 젊은 사람들에게 좀 미안스러워서” 투표장에 가지 않았단다.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놓고 고민 중이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절대 호흡기를 오래 붙여놓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터다. 아버지의 딸인 나는, 실용적이고 냉정하게, 연명 기간을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남은 가족이 안 헛갈린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눈치를 살피며 “두… 두 달쯤?” 했다가 엄마에게 한소리 들었다. “무슨 두 달씩이나. 자식이건 손주건 지구 끝에 살아도 두 주면 오간다”고. 아, 할매의 위엄. 아버지는 딱 하루 더해서 보름만 하기로 했다. 주위에 부담 안 주고 깔끔 떠는 게 아버지가 지키고 싶은 삶의 기준점이랄까 영점이다.

그런 아버지인지라 나중에 부고를 내는 게 내키지 않는다. 당장 나부터도 누군가의 부고를 들으면 가까운 이를 제외하고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감한 기분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세상에 별로 안 남았기 때문에 소리소문 없이 떠나고 싶으시단다. 나는 풍광 좋은 어느 구석에 처박혀서 조용히 천천히, 떠난 아버지와 헤어지고 싶다. 아버지는 요새 나랑 만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적당한 장례 절차를 따져보는 중이다. 밥값은 번갈아 낸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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