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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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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의 사진병, 역사를 찍다

한국전쟁 초기 총을 놓고 카메라를 든 턴불 병장

전문 사진가 아닌 사진병이 찍은 ‘역사의 명장면’
등록 2018-02-18 00:08 수정 2020-05-03 04:28
<사진1> 71통신대 A중대 턴불(C. R. Turnbull) 병장(1950년 7월7일) 강성현 제공

<사진1> 71통신대 A중대 턴불(C. R. Turnbull) 병장(1950년 7월7일) 강성현 제공

사진은 한때 나에게 이미지에 불과했다. 문서 자료로 구성된 역사를 간단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자료 말이다. 역사책에 삽입되는 이미지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정지 화면처럼 포착하면 충분하다 여겼다. 그러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사진실을 둘러본 뒤 내 생각은 완전히 변했다. 무거워진 눈과 머리를 쉬게 할 요량으로 문서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진실로 들어가 사진 상자들을 신청하고 그 자리에 눌러앉아 사진 수백 장을 단숨에 들여다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NARA 사진실은 상상력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하나같이 ‘역사의 한순간’이라 할 만한 스틸 사진 수백 장을 보고 나면, 오래된 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간혹 사진의 인쇄 상태, 사진 프레임과 시선이 조잡하고 아마추어 같았지만, 그 시대, 그 장소, 그 사람들을 생생히 느끼게 해줬다.

사진의 파노라마 속에서 몇몇 ‘정지’ 사진은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그때마다 피사체의 사연이, 그것을 포착한 사진가의 의도와 생각이 궁금했다. 스틸 사진의 생산 맥락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사진 해설 정보에서 누가(사진가나 사진조직),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찍었고, 어떤 내용으로 기록했는지 일차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촬영했는지, 그 배경이 무엇인지는 관련 문서나 구술 자료를 발굴해 교차 확인을 거쳐야 더 분명해질 수 있었다. 어느새 나는 사진을 자료 자체로 분석하고 있었다.

사진실에서 주로 본 사진들은 해방 뒤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한 장면’이었다. 이제는 역사의 명장면이 된 사진들도 있지만, 아직 역사화하지 않은 장면도 많다. 이 사진들 대부분은 민간 전문 사진가가 아닌 군 사진병이 찍은 것이다.

맥아더 직속 사진부대서 활동

한국전쟁 초기 한국에서 활동한 턴불 병장이 찍은 사진들. 무엇보다 그가 찍힌 사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부대’ ‘사진병’ ‘사진(작전)활동’이란 단어가 아주 생소할 때 이 사진들을 보았다. 그 가운데 은 도로에서 카메라를 조작하는 턴불 병장의 모습을 포착했다. 누가 어디에서 어떤 목적으로 그를 찍었을까?

턴불은 데인절(R. Dangel) 상병, 행콕(R. L. Hancock) 일병과 함께 1950년 6월28일 오후 수원비행장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이튿날인 6월29일 아침 일본 도쿄에 머물던 더글러스 맥아더 총사령관이 참모들과 전선 시찰차 내한했는데, 턴불은 선발대로 들어왔다. 카메라 앞에 나서길 즐겼던 맥아더의 직속 사진부대(71통신대 A중대 사진대) 사진병이었다. 맥아더 일행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턴불·데인절·행콕은 남았고, 한국에 급파된 미 24사단의 예하 부대를 따라가며 ‘임무’(사진활동)를 수행했다. 7월20일 대전 시가지 전투에서 다쳐 일본으로 후송될 때까지 턴불은 대전과 경기도 평택 사이를 오르내리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사진 속 턴불은 충남 조치원과 천안 사이 1번 국도 어디쯤에 있다. 데인절과 행콕 중 한 명이 자신들의 사진활동 기록을 위해 턴불을 찍었을 것이다. 비공식적인 사진 촬영일 수도 있다. 사진병들이 남긴 사진 가운데는 셀카처럼 서로를 찍은 모습이 제법 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턴불이 들고 있는 카메라다. 그라플렉스사의 ‘컴배트 그래픽 45’ 기종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썼던 목측(目測)식 카메라로, 촬영자가 눈으로 거리를 측정하고 렌즈를 손으로 빼서 피사체와의 거리를 눈으로 측정한 다음 노출계를 이용해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맞춰가며 찍는다. 카메라 상단부에 직각으로 휘어진 가느다란 철사를 당기며 감각적으로 찍는 것이다. 상륙작전용 카메라로 알려졌는데, 왜 턴불이 이 사진기를 육상 전쟁터에 들고 다녔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보병에게 총이 그렇듯 그에게 이 카메라는 손에 익은 분신이었을 거다. 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 한복판에서 명장면이 될 만한 역사의 한순간을 포착한 것은 경이롭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맥아더의 한강 전선 시찰 모습,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의 이동, 금강교 폭파, 특히 대전 시가지 전투에서 철모도 벗어버린 채 브라우닝 기관총을 뿜어대는 미군 병사를 포착한 장면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하는 데 신경 쓰지 않고 촬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쟁 넘어 일상생활 순간도 포착
<사진2>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이감 중인 사상관계 소년범들(1950년 7월1일). 강성현 제공

<사진2>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이감 중인 사상관계 소년범들(1950년 7월1일). 강성현 제공

<사진3>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이감 중인 사상관계 소년범들(1950년 7월1일). 강성현 제공

<사진3>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이감 중인 사상관계 소년범들(1950년 7월1일). 강성현 제공

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스틸 사진은 바로 사진병들이 찍은 전쟁사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군은 전술부대의 전투활동을 지원하는 전투사진, 군의 인사 증명, 공보용 뉴스 사진, 영화, 역사 기록, 심리전 프로젝트 등을 위해 미 육·해·공군 산하 부대에 사진조직을 만들어 확대했다. 민간의 직업사진가들을 소집하거나 비사진가를 훈련해 ‘사진병’으로 동원했다. 지난 연재에서 다룬 버마 미치나, 중국 쑹산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 사진들은 중국·버마·인도 전쟁터에서 활동한 164통신대사진중대 사진병들이 찍었다. 앞으로 다룰 해방 뒤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사진들도 하지(J. R. Hodge) 중장의 제24군단 소속 123통신사진파견대, 주한미군정의 502통신사진파견대, 맥아더 총사령관의 71통신대 A중대 사진대,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사진병들이 찍은 것이다.

군의 사진활동으로 생산된 한국 관련 사진, 특히 전쟁사진은 아주 방대하다. 우선 양이 압도적으로 많다. NARA 사진실에만 10만 장 넘는 한국 관련 사진 자료가 있다. 무엇보다 이 전쟁사진 아카이브는 서울 중심성과 특정 주제 편향성에서 벗어나 있고, 사진 속 피사체가 군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해 질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서울부터 제주도에 이르는(심지어 한국전쟁 ‘북진’ 시기 평양, 진남포, 함흥, 흥남, 원산 등) 한국의 주요 지역은 물론 아시아 지역들로 ‘트랜스-로컬’하게 넘나들며 찍은 사진들이다. 군의 전투, 작전, 군정, 일반 정치 상황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문제와 문화, 일상생활의 순간까지 포착했다.

순간 포착의 목적이 기록, 선전, 그 밖의 무엇이든 피사체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만이 빈약하고 듬성듬성 구성된 공식 역사의 빈틈을 풍부하게 메워가며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은 여전히 대한민국 공식사(史)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정되지만 머잖아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를 새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어디선가 ‘처형’됐을 소년범들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묘한 긴장감을 주는 사람들이다. 경계하는 경찰과 한국군이 보이고, 앳된 소년들이 납작 엎드리듯 앉아 있다. 더위와 기다림에 지친 것일까? 두세 명만이 카메라를 의식할 뿐 대부분 걱정과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살피고 있다. 이곳은 어디이고, 이들은 누구일까? 1950년 7월1일 이 사진을 찍은 행콕 일병은 이들을 ‘북한군 포로’로 알고 포착했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이 사진 속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난 고성능 스캔을 시도했다. 프레임 후경의 건물은 분명 기차역이었는데 어딘지 특정할 수 없었고, 그러던 차에 왼쪽 건물의 세로 현판이 눈에 띄었다. 고성능 스캔 덕분에 ‘수원경찰서 역전경찰관파출소’라는 글자를 판독할 수 있었다. 장소는 수원역이었다. 이날 수원역 앞에 북한군 포로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이들은 인천소년형무소에서 후방의 다른 형무소(대전형무소)로 이감 중이던 이른바 사상관계 소년범들로 판단된다. 한국 정부에 의한 형무소 재소자 학살 관련 증언과 연구에 따르면, 제주 4·3과 여순 사건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약식 군법회의를 거치거나 재판 절차도 없이 형무소로 끌려왔다. 죄목과 형기를 형무소에 와서 아는 경우가 횡행했다. 인천소년형무소에는 단기형을 받은 제주 4·3과 여순 사건 관계 소년범이 많았다. 문제는 1950년 ‘재소자인명부’ ‘재소자인원일원표’ ‘교정통계표’ 등 어떤 관련 자료에도 이들의 이감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거다. 이들은 개전 직후 이감 과정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분명히 안다. 불법적으로 어디에선가 ‘처형’됐을 것이다. 설령 이들이 대전형무소로 무사히 옮겨졌더라도 대전 인근 산내 골령골의 ‘처형’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행콕 일병에 의해 시각화되고, 이후 검열을 피해 전쟁 중 나온 사진집에 실리게 된 것은 북한군 포로로 오인됐기 때문이다.

같은 피사체, 다른 인식

흥미롭게도 주한미군사고문단 사진장교 윈즐로(F. J. Winslow) 중위도 하루 전날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피사체에 시선을 빼앗겨 거의 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윈즐로는 이들을 ‘북한군 포로’가 아닌 피란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남한 민간인’으로 인식했다. 적군 포로가 아닌 민간인으로 본 점에서 윈즐로가 더 정확했지만, 어째서 이들을 피란민으로 알았을까? 윈즐로의 사진 속 경찰들의 경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론가 끌려가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전쟁 전부터 한국에서 사진활동을 했고, 한국인에게 인도주의적 시선을 담은 사진을 많이 남긴 그가 정말 착각했던 것일까? 착각보다는 검열이었을 것이다. 이 사진 뒷면에 찍힌 ‘배포 불가’(not released) 표시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닐까?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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