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이 사람을 구속한다. 62년 동안 요지부동인 문장이 사람을 감옥으로 몰아넣고 있다. 해마다 4만 명 안팎이다. 충남 청양군 인구보다 8천 명 많다. 형법 제69조 얘기다.
“제69조(벌금과 과료) ①벌금과 과료는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내에 납입하여야 한다. 단, 벌금을 선고할 때에는 동시에 그 금액을 완납할 때까지 노역장에 유치할 것을 명할 수 있다. ②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한 자는 1일 이상 3년 이하, 과료를 납입하지 아니한 자는 1일 이상 30일 미만의 기간 노역장에 유치하여 작업에 복무하게 한다.”
그날 밤 교도소 앞에서 이루어진 기적
1953년 형법 제정 때 만들어진 이 조항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제70조 조항과 연결된, 이른바 환형유치 제도다. 환형이란 형벌의 종류를 바꾼다는 뜻이다. 벌금형을 신체형으로 둔갑시키는 행위다. 벌금 낼 돈조차 없다는 이유로 가난한 이들을 구치소에 가두는 게 과연 정당한가.
한국 현대사에서 환형유치 조항을 극적으로 환기하는 장면이 있다. 1975년 2월15일 밤이다.
“김준일을 비롯한 출감자들은 수감자들이 모두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기다린 사람은 백기완이었다. 그가 육 년 전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선고받은 벌금 십만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는 교도소 측의 입장이 전해지자 모금이 벌어졌다. 김준일은 나의 호주머니를 털었고, 나는 적은 돈이지만 즐겁게 내주었다. 하지만 십만원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적은데다 기자들은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분주히 오가는 김준일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를 포대기로 둘둘 말아 등에 업은 아주머니였다. 아이 어머니라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 보였다. 그녀는 만원권 지폐 몇 장을 나에게 건네며 모금에 보태라고 했다.”(정찬 장편소설 )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전 구속됐던 사람들이 이날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소설가 김훈은 당시 2년차 기자로서 현장을 취재했다. 그 또한 이날의 기억을 기사와는 별개로 훗날 기록했다. 시인 김지하는 백기완보다 1시간 남짓 전에 사람들에게 들려 목말을 탄 채 서울 영등포교도소를 떠났다. 백기완 또한 석방 대상이었지만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 바로 벌금 미납액이었다. 소설에서 묘사된 “아이 어머니라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 보였”던 여인은 김지하의 장모인 소설가 박경리(1926~2008)를 가리킨다. 등에 업힌 아이는 김지하의 아들이었다. 백기완은 밤 11시께 교도소 정문을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밤 교도소 앞에서 벌어진 모금 운동의 작은 기적. 그날로부터 40년이 흐른 2015년, 주머니를 뒤져 지폐를 긁어모았던 사람들의 인간 된 마음이 사회적으로 확장됐다. 장발장은행이다.
39명이 대출금 분할 상환 시작지난 2월25일 서울 만해NGO교육센터에서 장발장은행 출범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보다 앞서 인권연대는 2013년부터 벌금제 개혁을 위해 ‘43199 위원회’를 꾸리고 활동해왔다. 숫자 43199는 2009년 기준으로 벌금을 못 내 노역장(구치소)에 갇힌 시민들의 수를 가리킨다. 제도 개선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국회·법원의 ‘시혜’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몸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어서, 갇히면 어쩌지 못한다. 벌금 몇십만원에서 몇백만원 때문에 몸이 갇히면, 그 몸에 기대고 사는 가족들이 함께 무너진다. 법은 이런 사정을 아우르지 못한다. 사람이 해야 한다. 그래서 장발장은행이 문을 연 것이다.
장발장은행의 보이지 않는 금고에는 마음이 가득 쌓여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건네는 측은지심. 형법의 잘못된 조항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비지심. 위임받은 형벌권을 남용해 가난한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는 국가에 대한 수오지심. 큰돈을 은행에 후원하고도 자신은 끝내 감추고 물러서는 사양지심. 네 가지 마음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사각형’, 그것이 장발장은행의 보이지 않는 금고다.
지난 6월 말까지 1200명 넘는 시민·단체에서 3억원 넘는 후원금을 은행에 보냈다. 지난 4월 한 시민은 1억원을 쾌척했다.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는 500만원을 후원했다. 십시일반 사랑으로 지금까지 10차례 심사를 거쳐 177명이 교도소 문턱을 넘지 않고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39명이 대출금 분할 상환을 시작했고, 26살 청년은 150만원을 한번에 모두 갚았다. 은행으로 돌아온 대출금은 6월 말 기준으로 1125만원에 이른다. 애초 원칙은 벌금을 대출받은 뒤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1년 동안 상환하는 것이었다.
6월4일에는 국회에서 여야 국회의원 3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국회로 간 장발장’ 행사도 열렸다. 은행 출범 100일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은 처음으로 국회를 방문해 이날 행사의 빛을 더욱 밝혔다. 나흘 뒤인 6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은 동료 의원 41명과 함께 형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의원들 다수가 개정안 취지에 공감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법안 통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개정안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겼다.
1) 징역·금고에만 있는 집행유예를 벌금에도 적용한다. 징역·금고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벌인 벌금형에 집행유예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2) 벌금 납부 기한을 연장하거나 분할 납입할 수 있도록 한다. 1개월 안에 일시불로 납부하도록 획일적으로 규정한 탓에 노역장에 유치되는 시민이 끊임없이 생겨온 탓이다. 3) 벌금 납부 기한의 연장이나 분할 납부, 벌금을 사회봉사로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법원과 검사는 당사자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 제도가 있어도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 시일 안에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기를 기대한다.
시민 1061명이 모두 1171만원 후원‘우리 시대 장발장들’ 연재 기사는 이번호가 마지막이다. 은 장발장은행의 도움으로 교도소 대신 가정, 노역장 대신 일터로 향할 수 있게 된 이들의 이야기(‘우리 시대 장발장들’)를 지난 4~6월 모두 7차례 연재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뉴스펀딩에도 연재 기사를 동시에 실었다(‘우리 곁의 장발장’). 기사에 공감한 시민 1061명이 모두 1171만원을 뉴스펀딩에 후원했다. 후원금 대부분은 조만간 장발장은행에 전해진다. 마무리 기사를 쓰기 위해 7월1일 찾은 장발장은행(인권연대 사무실)에는 벌금 대출을 간절히 바라는 ‘장발장’들의 신청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장발장은행을 운영하는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줄여보자는 게 인권의 역사다. 형법이 개정되면 해마다 벌금을 못 내 교도소에 갇히는 4만 명 가운데 2만 명 이상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제도가 개선되면 더는 장발장은행이 필요 없게 된다. 소주 한 잔, 탁주 한 대접을 들이켤 때마다 장발장은행의 ‘아름다운 폐업’을 소망하고 있다. 사람이 문장을 구속해야 한다.(끝)
슬픈 여로였다.
여로(藜蘆)는 한반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나무 아래나 풀밭에서 잘 자란다. 성질이 차고 맛은 쓰다. 잘못 쓰면 독이 되지만, 쓰임에 따라 약으로 구실한다. 사람의 삶도 그러하리라는 걸 알았다. 잘 다스리면 삶은 별보다 빛나고 아름답다. 잘못 디디면 삶은 명도 ‘0’의 갱도가 된다.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우리 시대 장발장들’을 연재하면서 모두 7명을 만났다. 오가는 길에서 여로를 생각했다.
고된 기로였다.
기로는 갈림길이고 갈림길은 선택을 강요한다. 처음 만난 쉰일곱의 영수씨. 그는 선택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삶의 신호등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젊어서는 수도사가 되려고 했다. 가난은 완강한 허리띠처럼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1500원짜리 봉지된장은 지금도 쓴 약같이 슬프다. 취재를 마친 뒤 그와 함께 먹은 짬뽕도 잊을 수 없다. 맵고 짜지만 달콤한 짬뽕, 그에게도 달콤한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는 선했다.
맑은 안개였다.
강원도 태백시에서 만난 마흔여섯의 철수씨. 그가 그립다. 집집마다 마당의 윗목까지 들어선 태백의 산들이 그립다. 그곳에서 그는 2~3일마다 신장 투석을 하며 견디고 있었다. 노동자였으되 제 몸보다 타인을 더 염려한 탓에 그는 고생하고 있다. 노모의 걱정이 마당에 널어놓은 두릅보다 많았다. 그래도 철수씨는 잘 웃었다. 그를 보면서 ‘맑은 안개’라는 형용모순을 생각했다. 앞을 가로막는 안개 같은 삶 앞에서 그는 맑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올여름 태백에 가련다.
아픈 먼지였다.
다섯 살 딸과 지내는 마흔 살 경희씨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홑이불이 사르륵거리는 목소리를 가졌다. 여인이었다.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딸은 그의 또 다른 심장이었다. 경희씨는 두 개의 심장을 품고 산다. 만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신경질적인 바람이 불었다. 미운 바람 속에 먼지가 가득했다. 위태로운 경희씨에게는 먼지도 아프다. 바람 부는 날, 경희씨가 떠오른다.
엄마 홀로 사남매를 건사하는 영수네. 고아로 자라 어머니 얼굴조차 기억 못하지만 씩씩한 석정씨. 홀어머니 모시고 당차게 미래를 설계하는 철호씨. ‘노동의 무한궤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철용씨. 이들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거울이 아니라 이들의 삶에 우리를 비추어서, 시루떡 한 조각이라도 나누는 연대를 꿈꾸었으면 좋겠다. 켜켜이 떡이 쌓인 시루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포개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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