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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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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보여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대출금 150만원 모두 상환한 첫 번째 장발장, 아픈 홀어머니 모시며 아버지가 남긴 빚도 갚은 청년 가장 철호씨 이야기
등록 2015-06-18 07:10 수정 2020-05-03 04:28
지난 6월10일 경기도 구리에서 만난 철호(가명)씨. 성실하고 총명한 그는 좋은 아빠를 꿈꾸는 멋진 청년이다.

지난 6월10일 경기도 구리에서 만난 철호(가명)씨. 성실하고 총명한 그는 좋은 아빠를 꿈꾸는 멋진 청년이다.

그해 겨울은 빈털터리였다. 동료들과 어울린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 추웠고 미끄러웠다. 서울 종로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었다. 빨갛게 ‘빈 차’ 표시가 돼 있는데도 택시 기사들은 막무가내 손사래였다. 발밑이 불안한 시절이었다. 일이 풀리지 않았던 때였고, 싸구려 술에 마음이 풀어졌다. 한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화를 막고 있던 둑이 무너졌다. 택시 뒷문에 냅다 발길질을 해버렸다. 일 더하기 일은 이가 되는 것처럼, 기사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만취가 아니었다. 철호(26·가명)씨는 기사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다. 기사가 경찰을 불렀다. 한겨울 칼바람이 귓불을 때렸다. ‘이건 아닌데….’

다음날 60대 기사에게 전화를 했다. “술을 마시고 어르신한테 몹쓸 짓을 했다. 죄송하다. 합의를 해달라.” 기사는 자동차 수리비 20만원을 더해 합의금 300만원을 요구했다. 기사는 철호씨가 자신을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함께 술을 마신 동료들이 곁에 있었다면, 철호씨의 ‘결백’을 입증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리가 파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기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합의금이라고 생각했다. 왜 택시를 발로 찼을까, 후회가 차가운 성에처럼 철호씨의 마음을 덮었다. 마음이 영하로 곤두박질했다.

그해 겨울도 빈털터리였다. “아버지는 병원에 2년을 계셨어요, 식물인간으로.” 철호씨의 아버지는 3년 전 쓰러졌다. 아버지는 병원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그날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병원 주변의 눈을 쓸고 아버지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평소에도 지하실이 훨씬 춥다 하셨다. 억! 아버지는 쓰러졌다. 급격하게 수축한 혈관은 아버지의 머리에서 터졌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는 지난해 1월 절명하실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의식은 그날 그 지하실에서 끝내 땅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예순일곱 연세로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위암이 발견됐다. 식물인간 상태였던 아버지에게 항암치료는 닿을 수 없는 의료 영역이었다. 6개월 만에 아버지를 묻었다. 눈을 감고 2년을 병상에서 누워 있던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세상을 떴다. 마지막 말조차 나누지 못했다. 직접사인은 위암이었다.

기획 연재


우리 시대 ‘장발장’들


빈털터리 인생, 택시 뒷문 냅다 발길질

철호씨는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철호씨의 등을 밀어주기가 버거웠다. 철호씨는 잘난 부모를 둔 친구들처럼 잘 나가는 바퀴를 달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철호씨는 제 두 발로 언덕을 오르고 내리막을 내달려야 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이 다 좋아라 하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반년도 안 돼 자퇴서를 냈다. 휴학이 아닌 자퇴를 하면서 철호씨는 순식간에 세상으로 던져졌다. 가난했다. 군대를 갔다 오고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가는 대로 일은 풀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그 택시와 맞닥뜨린 것이다.

법원은 철호씨에게 폭행·재물손괴 등의 죄를 지었다며 벌금 150만원의 약식명령을 선고했다. 철호씨는 인정할 수 없었다. 택시 뒷문을 발로 찬 것은 사실이지만 기사를 폭행하지는 않았다. 기사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폭행죄를 감당하라는 것이 억울했다. 정식재판을 청구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저는 법을 믿지 않아요.” 훤칠한 키에 총명한 얼굴의 철호씨. 두 눈이 차가운 성에처럼 반짝였다. 지난해 말 벌금형이 확정됐다.

그사이 철호씨는 수레바퀴처럼 일했다. 쉬지 않았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그는 가장이었다. 어머니는 오랜 병간호에 지쳐 몸이 무너진 지 오래다. 다리가 불편하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만도 5분 넘게 걸린다. 병원을 찾아가도 또렷한 진단이 나오지 않는다. 홀어머니를 둔 철호씨는 제 몸을 적시며 물을 퍼올려야 하는 수차가 되었다. 아버지의 오랜 투병이 남긴 빚 3천만원을 지난해 말 모두 갚았다. 목심마저 젖어버린 나무처럼 그는 지쳤다.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던 철호씨에게 벌금 납부 고지서가 날아든 것이다. “맨날 일만 해서, 한 달만 쉬고 싶었어요.”

벌금 분할납부를 신청하려고 검찰청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야박했다. 고지서에 적혀 있는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알아서 돈을 마련하라고 내뱉고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서류로 증명할 수 없는 사정은 법 앞에서 사정이 될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자 지명수배가 된다는 문자메시지가 전화기에 얼음처럼 꽂혔다.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장발장은행을 보지 않았더라면 철호씨는 구치소에 끌려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3월13일 장발장은행에 신청서를 보냈고 일주일 만에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장발장은행 아니었다면 구치소 갔을지도

애초 철호씨는 다달이 25만원씩 6개월 동안 대출금 150만원을 갚을 참이었다. 그는 6월9일 대출금 전액을 장발장은행에 상환했다. 장발장은행에 대출금 일부를 갚은 이들은 6월12일까지 31명, 금액으로는 834만원이다. 대출금을 모두 상환한 건 철호씨가 처음이다. “빌렸으니까 당연히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돈이 생겨서 얼른 갚고 속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안경 너머 철호씨의 두 눈이 성에 녹은 물방울처럼 반짝였다.

철호씨는 꿈이 있다. 직업 따위를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6월10일 만난 철호씨에게 “어떤 꿈이죠?” 물었다. 그는 예쁘게 말했다. “벌금이 나왔을 때는 포기하고 싶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잘 안 풀리고 ‘플러스 인생’이 안 되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장발장은행에서 벌금을 빌려줬고 이제 다 갚았잖아요?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어요.” 다시 물었다. “꿈이 뭐예요?” “능력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아이가 고래를 보고 싶다고 하면 아이를 태평양으로 데리고 가서 ‘저게 고래야’라며 보여줄 수 있는 아빠, 그런 능력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철호씨는 31살쯤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5년 남았다. 철호씨의 구릿빛 구두가 튼튼해 보였다.

*‘가난이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모아 지난 2월 문을 연 장발장은행이 6월4일 100일을 맞았습니다. 무이자·무담보로 벌금을 대출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은 장발장은행의 도움을 받은 우리 시대 ‘장발장’들의 사연을 연재합니다. 기사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뉴스펀딩에도 매주 월요일 오후 공개됩니다. 뉴스펀딩을 통해 모인 독자 여러분의 후원금 대부분은 장발장은행에 전해집니다.구리=글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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