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우리 시대 ‘장발장’들
① 반지하방, 희망은 움튼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쿨럭쿨럭 밭은기침. “1980년 봄, 전두환이 나서서 설칠 때였어요.” 23살 다대오는 가난한 집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거리는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욕망을 버린 그는 서늘했다. “나 자신을 버렸어요.” 서울 성북구 삼선동 ‘사랑의 선교 수사회’ 수도원. 새벽 4시에 일어나 침묵의 기도, 5시에 미사를 올리고 돌아와 방을 정갈하게 치웠다. 7시에 아침을 먹고 다시 기도를 했다. 담배를 자주 태우는 그를 보고 동료들이 ‘염소 수사’라며 하하 웃었다. 받아 웃는 다대오도 손에 쥔 담배가 뜨듯했다. 점심때까지 성서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시립동부병원으로 향했다. 행려병자, 가족한테조차 버림받은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면도 도구가 든 가방을 늘 지니고 갔다. 매일같이 삐죽삐죽 불거지는 수염, 그들의 불운한 삶인 듯 거친 수염을 보드랍게 깎아줬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하루하루 깊었다. 행복했다. 그는 3대째 이어진 모태신앙. 낙엽이 거리에 수북이 쌓인 늦가을, 떠나온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다대오의 학력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였다. 14살 때부터 공장 시다(작업 보조)를 했다. 털이 부숭부숭한 곰인형을 참 많이 만들었다. 수도사로 일생을 보내겠다고 주먹을 꼭 쥘 때까지 8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가 12살 때 아버지는 일곱 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자식 일곱을 죄다 담을 것만 같은 광주리를 머리에 얹고 어머니는 과일 행상을 했다. 옥수동 판자촌 집은 먹을 것 없어 더 어두웠다. 굶주린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그치지 않았다. 못 먹어 더 좁은 그의 어깨처럼 집안 살림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수도사가 되겠다며 집을 나서고 채 1년도 안 된 그해 겨울, 궁핍에 몰린 어머니가 그를 다시 찾았다. 먹고살기 너무 고되다는 홀어머니를 두고 신에 귀의할 수는 없었다. 수도사가 되려던 그는 다시 시다로 돌아왔다. “그때 그 수도원. 거기서 나를 버리니 마음이 차분했어요. 무게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마른 입술로 그는 담배를 다시 꺼냈다.
세례명 다대오(Thaddaeus), 김영수(57·가명)씨. 스물셋 신앙으로 쨍 빛나던 그는 지금 반지하 월세방에 산다. 경기도 부천의 한 주택가 골목. 지난 4월21일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차갑게 식은 목욕탕에 들어선 듯 습기가 코를 찔렀다. 모처럼 볕 좋은 날이었지만 그의 방은 컴컴했다. 싸늘한 방바닥. “겨우내 보일러를 한 번도 안 틀었어요.” “그럼 추워서 어떻게 지내세요?” 깔고 앉은 전기장판을 그가 손으로 가리켰다. ‘1’. 전기장판의 온도 눈금 ‘1’. 스위치를 켰는지 껐는지 알기도 힘든 온기. 그렇게 김씨는 지난겨울을 견뎠다. 가족도 없다.
“하루는 집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작은애 분유 살 돈이 없다고.” 그는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버스를 탔다. 다 버리고 싶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차창 너머로 우연히 아파트 공사장이 보였다. 다음날부터 그곳에서 잡부로 일했다. 목수 보조일을 하면 일당을 1만원이나 더 쳐주는 것을 알고 목수일을 배웠다. 하루 벌이가 1만5천원에서 2만5천원으로 늘었다. 술도 갈수록 늘었다. “1996년 9월13일이에요.” 아침에 깨어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숙취가 머리를 때렸다. 서울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낳은 아들과 딸도 없었다. 부인은 더는 못 견디고 집을 버렸다. “그 전날도 술을 많이 먹었어요. 돈도 잘 못 벌고 하니까 아내가 애들 데리고 나가버렸어요.” 마음이 시궁창에 처박혔다. 처자식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다 포기하고 싶었다. 시다를 거쳐 재단사가 되고 기계를 사서 작은 공장을 차리고 살던 시절, 은행 융자를 받아 산 5천만원짜리 집도 있었고 차도 굴렸다. 다 없어져버렸다. 융자를 못 갚은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그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이듬해에는 홧김에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사고까지 냈다. 벌금 300만원. 알음알음 겨우겨우 150만원을 마련해 검찰청에 갔더니 직원이 다정하게 손짓을 했다. “얼른 들어오세요.” 순진하게 들어갔다가 그대로 갇혔다. 1평이나 될까, 좁은 방에 갇힌 그를 누나가 급히 돈을 마련해 꺼내줬다. “거기 좁은 데 갇혀 있으니까 숨도 제대로 못 쉬겠더라고요.” 그는 그 방이 지금도 두렵다. 두려워 술도 끊었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는 공사판 목수일도 다 끊겼다. 마을버스 운전을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석 달 만에 그만두었다. 배차 시각을 맞추려면 신호 위반은 물론 곡예 운전을 서슴지 않아야 했다. “다른 기사들이 다 놀렸어요. 저처럼 곧이곧대로 하는 사람은 배차를 못 맞춰요. 하루는 새벽 첫차를 끌고 나가는데 폐지 줍는 할머니가 어둠 속에서 거의 안 보이는 거예요. 딱 사고 나기 좋겠더라고요. 그날로 관뒀어요.”
하수도처럼 비루한 마음이 온몸에 퍼지고다시 목수일. 10년 넘게 무덤처럼 엎드려 살았다. 그러던 지난해 봄, 그예 사달이 났다. 집 앞 골목길에 승합차를 세워두던 사람과 시비가 잦았다. 사람이 다니지도 못하도록 주차하는 사람이 꼴같잖았다. 소주를 한 병 사서 마셨다. 취하니 엉망이 됐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수도처럼 비루한 마음이 온몸에 퍼졌다. 빈 소주병을 들고 나가 차 앞유리를 내리치고 말았다. 경찰 조사를 받고 검사 앞에도 불려갔다. 벌금 50만원 약식명령서가 얼마 뒤 날아들었다. 납부 기한은 지난해 12월20일까지.
형틀 목수로 일하는 그의 일당은 15만원. 인력사무소 수수료 10%를 떼면 13만5천원을 쥔다. 일거리가 일주일에 사나흘만 되면 한 달에 돈 100만원은 넘는다. 그러나 김씨가 올해 들어 넉 달 동안 일을 나간 건 13일밖에 안 된다. 일거리가 없다. “중국동포들이 다 가져가요. 부리기도 쉽고 일당도 더 싸서 그렇죠. 인력사무소 세 군데에 얘기를 해놨는데 연락도 잘 안 오고….” 1월에는 단 하루도 일을 못했다. 2월에 엿새, 3월에 나흘. 4월에는 단 사흘밖에 일을 못했다. 설령 일거리가 많아도 예전 사고로 다친 무릎 때문에 사나흘 내리 일을 하기도 버겁다. 일이 없으니 끼니도 형편없다. 비닐에 담긴 1500원짜리 된장 한 봉지조차 세 번에 나눠 먹는다. 아니면 라면. 반찬은 시장에서 사온 김치 3천원어치가 전부. 그것도 없이 그냥 멀건 된장국에 밥을 조금 말아 먹으면 끝이다. 그나마 하루 한 끼다. 정부에서 받는 거라곤 다달이 장애수당 4만원뿐이다. 2012년까지는 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선정 기준이 강화되면서 그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는다. 아끼려야 아낄 돈이 없다. 벌금 50만원이 그의 어깨를 50만 근처럼 내리눌렀다.
‘벌금 납부 기한이 많이 지났습니다. 현재 집중 검거 및 재산 압류 중입니다. 벌금은 형벌로 납부를 미루거나 면제받을 수 없으니 유념하여 더 불이익 받기 전에 즉시 납부 바랍니다.’
잊을 만하면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검거·압류·불이익, 무서운 낱말들이 그를 옥죄었다. 현행 형법은 벌금을 제때 납부하지 않으면 그 금액만큼을 날짜로 환산해 구치소(노역장)에 수감하는 환형처분제도를 두고 있다. 2014년 벌금 낼 돈이 없어 구치소에 갇히는 처분을 당한 사람은 4만2871명이다. 벌금 미납으로 수배를 당한 지난 몇 개월, 일 없으면 매일같이 가는 서울 동묘 풍물시장 길이 갑자기 불안해졌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경찰관 2명이 자주 불심검문을 했다. 김씨는 멀찍이서 경찰관을 피해다녔다. 뒤를 자주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3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장발장은행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보았다. 김씨처럼 벌금 낼 돈이 없어 구치소에 끌려갈 처지에 몰린 이들에게 벌금을 무이자·무담보로 빌려준다는 것. 동 주민센터 직원의 도움으로 신청서를 적고 필요한 서류를 모아 보냈다. “장발장은행은 정말 잘 태어난 거 같습니다.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상환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4월1일 전갈이 왔다.
‘장발장은행에서 벌금 50만원을 대출해드렸습니다. 귀하께서는 4월부터 매월 20일에 대출금을 상환하시기로 했습니다. 꼭! 기일 내에 갚아주셔야 다음 분에게도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납부 영수증 사본도 보내주셔야 합니다. -장발장은행(02-2273-9004).’
벌금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구치소에 곧바로 가두는 게 과연 정당한 국가 형벌권의 행사인가, 장발장은행은 묻고 있다. 개인의 경제적 처지에 따라 벌금 부과 액수를 달리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제1054호 현장 ‘장발장들의 마지막 기댈 곳’ ‘형벌에 실질적 평등을!’ 참조). 표준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때 짜장면이라 읽고 자장면이라 써야 하는 때가 있었다. 어느 학생이 물었다. “그러면 짬뽕은 잠봉이라고 해야 하나요?” 언어학에서는 이를 일러 ‘과잉 교정’(over-correction)이라고 한다. 김씨는 분명 죄를 지었다. 그러나 개인의 처지를 무시한 획일적인 총액벌금제가 교정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권력의 ‘과잉 교정’은 아닌지, 장발장은행은 묻고 있다. 지난 3월2일부터 4월15일까지 장발장은행에서 벌금을 대출받은 이들은 99명, 시민 후원으로 충당한 대출금은 모두 1억7천만원가량이다.
통장에 3만6174원이 남았지만
김씨는 인터뷰 나흘 전 장발장은행에 10만원을 상환했다. 상환 예정일인 4월20일보다 사흘 앞서 돈을 입금했다. “내가 안 먹을망정 꼭 갚을 거예요. 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입니다. 이거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월세 13만원이나 전기요금 따위를 단 한 번도 밀려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장발장은행에 돌려줘야 할 돈이 아직 40만원 남았다. 김씨의 예금통장 잔액은 3만6174원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탄핵으로 나갔다 탄핵 앞에 다시 선 최상목…“국정 안정 최선”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윤석열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니까 끌어내”…국회 장악 지시
“교수님, 추해지지 마십시오”…‘12·3 내란 옹호’ 선언에 답한 학생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안 가결…헌정사상 처음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이재명·우원식·한동훈부터 체포하라” 계엄의 밤 방첩사 단톡방
조갑제 “윤석열 탄핵 사유, 박근혜의 만배…세상이 만만한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키운 한덕수, 대체 왜 그랬나
[전문] ‘직무정지’ 한덕수, 끝까지 ‘야당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