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솔직히 미안하다. 아이티를 잘 몰랐다. 카리브해 어느메쯤 자리한 나라라는 건 알았는데, 쿠바와 얼굴을 마주하고 도미니카공화국과 한 섬을 나눠 살고 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제외하곤 지구촌 최대 빈국이란 걸 잘 몰랐다. 억장 무너지는 그 역사도 잘 몰랐다.
섬. 대륙의 관심을 잘라놓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일까. 아무래도 외로운 이름이다. 무슨 사달이 나지 않는 한, 그저 한가로운 여행지 정도로, 나무가 우거진 그럴듯한 풍경의 관성화된 이미지와 함께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섬이다.
알고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2세기 전 흑인 노예들이 해방 투쟁으로 일군 나라란다. 감히 백인들의 세계 지배를 한켠에서 무너뜨린 죗값으로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해상봉쇄와 무역제재의 보복을 당했고, 그걸 풀어주는 대가로 210억달러의 보상금을 122년에 걸쳐 갚아온 나라란다. 이후에도 빈민층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대통령이 쿠데타와 외세 개입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나라란다. 지구촌 공동체가 미필적 고의로 ‘왕따’시켜온 나라라고나 할까.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자. 대지진 이후의 혼란상을 지켜보면서 꼬리를 무는 의문이 있었다. 건물의 내진 설계는 언감생심이라고 해도, 평소 사회적 인프라만 좀더 갖춰져 있었다면 저만큼 아비규환으로 내몰렸을까. (오히려 육중한 건축 자재를 쓰지 못한 빈민촌에선 매몰 희생자가 적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키지 않는 용어지만, ‘선진화’된 나라들에서 진도 7.0의 강진이 발생했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평소 국제사회가 지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도왔더라면, 인류 문명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저 풍경들이 덜하지 않았을까.
보통 때 이웃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그 존재마저 잊힌 채 살아가다가 무슨 사달이 나야만 반짝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이 연상된다. 우리 공동체에 속하면서도 잊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 생활고에 못 이겨 집단 자살을 시도하는 가족이나, 혼자 방치돼 살아가다 사나운 개한테 물려 숨지는 어린아이나, 생활고와 빚에 몰려 사채업자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여인처럼, 억장 무너지는 사연을 지닌 사람들. 평소 공동체의 작은 눈여김만 있었더라면, 극단으로 몰리지 않았을 사람들.
아이티는 전세계적 복지망의 허술함에 무너진 소년·소녀 가장이요, 한부모 가정이요, 철거민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문명의 지혜가 부족함으로 인해 무너지는 가정들이 있으니, 그들은 대한민국의 외로운 섬, 아이티가 아닐까.
2.
아이티의 비극이 인프라 부족으로 가속화됐다는 생각에 또 하나의 단상이 꼬리를 문다. 인프라는 물질의 세계 넘어 정신 문명에도 적용된다. 차곡차곡 구축해온 사상과 논리와 지성의 밑돌이 없으면, 강도 7.0의 지진은커녕 사소한 바람에도 사회의 기둥이 흔들린다. 작금에 벌어지는 무죄판결 논란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기상천외한 법 논리도 아닌, 찬찬히 들여다보면 법률 문외한도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판결문들을 두고 왜 이리 야단법석인가. 이 정도 사안을 가지고 나라가 들썩거릴 만큼 우리의 법률 문화가 취약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평소 논리적 사고와 법리의 상식에서 (스스로) 소외됐던 일부 가짜 식자층의 호들갑에 나라가 진동하는 꼴이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뒤흔들 만한 지진이 났다면,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이나 검찰이 보이는 행태처럼 우왕좌왕하며 약탈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 일이 아니다. 차분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이성적인 수습을 도모해야 한다. 더구나 최근의 무죄판결들은 전혀 지진도 아니다. 그래서 더 슬프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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