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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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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처럼 하자구요?

등록 2009-03-20 23:05 수정 2020-05-03 04:25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께.
얼마 전, 워싱턴 히스패닉 상공회의소에서 교육정책에 대한 연설을 하면서 한국을 언급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국 학생은 한국 학생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한 달가량 적다. 미국 학사 일정은 방과 후 아이들이 농사일을 도울 필요가 있던 시기에 설계된 것이다. 새로운 세기에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미국에서도 가능하다.”
이런 정책이 인기가 없고 학교에 다니는 두 딸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유머에 잠시 웃음짓기는 했지만, 기사를 읽는 내내 한국인으로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당신이 내놓는 일련의 정책을 탐탁지 않아하다가 이번 연설에는 반색한 한국인들도 있기는 했습니다만.
이번 연설이 1950~60년대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는 같은 학교에 다닐 수조차 없었던 때에 나온 것이라면 어떤 점에서 수긍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은 사회계층이 달라도 같은 학교에 다니며, 가난한 학생이 고학으로 성공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았던 나라니까요.
하지만 아이들을 학교에 오래 붙잡아둔다는 점 외에 오늘날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미국의 한 누리꾼이 당신 연설을 다룬 기사에 이런 댓글을 붙여놨더군요.
“이제껏 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가운데 가장 무지한 발언이다. 한국 학교를 따라하자고? 일주일에 6일을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지내야 하고, 한 번의 시험으로 대학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평생의 운명까지 결정되는 교육.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우리 서구인들이 지난 2세기 동안 어린이의 성장과 학습에 대해 발견한 진리들을 무시하는 낡아빠진 체제다. 오바마 대통령은 얼마나 많은 한국 10대들이 암기 위주의 교육과 승자독식 제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이 누리꾼은 미국인이면서도 한국 사정을 꽤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과장도 섞여 있지만, 미처 언급하지 않은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 학생들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방과 후 학원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보면 밤 12시를 넘기기도 하지요. 일찍 퇴근한 아빠와 집 근처 공원에서 야구나 미식축구를 즐기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굳이 학교에 붙잡아두고 싶다면 할 수 없지요.
괜한 푸념을 늘어놓는 것 같아 겸연쩍지만, 몇 가지만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몇 년 동안 미국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상당수는 돌아올 때가 되어도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는답니다. 할 수 없이 부모 가운데 한쪽이 남아서 아이를 키우거나 아이만 남겨두고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한 선배는 자폐 증세를 겪는 아이를 치료하러 미국에 잠깐 머물다가, 아이가 한국에서와 달리 그곳 학교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아예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왜일까요? 더구나 한국에선 요즘 초등학생·중학생에게까지 입시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교육이 입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결과적으로 성공하는 고학생 수를 줄일 게 분명한 정책입니다. 자칫 계층에 따른 학교 분리 현상마저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께선 그래도 한국의 교육을 모델로 삼고 싶으신가요.
앞서 인용한 누리꾼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는 고문 같은 경쟁을 더 부추겨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교육과 일에 대한 생각을 재구성해, 날로 좁아져가는 지구에서 모두가 함께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공감 가는 말입니다. 앞으로 공개적인 연설을 할 때는 전체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함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바탕으로 하셔야 할 듯합니다. 악마는 늘 디테일에 숨어 있으니까요.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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