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6월인지라, 아무래도 20돌을 맞은 1987년 6월항쟁과 관련된 기억들을 되짚어보게 됩니다. 1993년 3월호를 들췄습니다. ‘전두환 부부와 함께한 방일 6박7일’이라는 기사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기자가 전통(전두환)을 본 것은 세 번째다. 처음은 정치부 기자 시절 대통령 신분으로 정치부 회식 자리에 나타났다. 6·29 선언 조금 이후로 기억한다. 그는 6·29 선언을 결단한 주역이 자신이라는 것 등의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 대통령이 특정 언론사의 부서 회식 자리에 출현했다니 양쪽의 ‘친분’이 어지간히 돈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선가요, 이 신문의 보도에선 5공화국에 ‘친화적’인 태도가 도드라집니다. 그해 4월13일 직선제 개헌 논의를 불허하는 ‘4·13 호헌 조처’가 발표된 뒤 나온 이 신문 사설의 한 대목입니다.
“이제부터의 주제는 개헌 논의가 아니라 현행 헌법에 의거한 정부 이양의 일정 전개라 할 수 있다. …개헌 논의는 일단 정치적 의제로부터 배제되며 개헌 방향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도 이 시점 이후부터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정지되게 되었다.”
국민적 요구인 직선제를 막무가내로 막는 호헌 조처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속내가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하긴 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상당수 언론이 4·13을 옹호하고 국민의 열망을 외면했습니다. 오죽하면 6월18일 밤 서울역 앞에선 부산·경남 지역으로 내려가는 한 언론사의 신문 4만여 부가 시민들의 손에 불태워졌을까요. 이 준엄한 국민 심판에 해당 신문의 일부 기자들은 스스로를 반성하며 진실 보도를 다짐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 성명의 한 대목입니다. “한국 언론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시민에 의한 신문의 대량 소각은 대중이 등을 돌려버린 우리 신문의 현 위치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불탄 듯한 아픔을 느낀다.”
요즘 노무현 정부의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놓고 정부와 언론의 대립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브리핑룸 통합과 공무원 면담 제한을 뼈대로 한 정부의 방침은 설령 선의에 바탕했더라도 국민의 정보 접근권과 ‘알 권리’를 제약할 소지가 큽니다. 정보 접근권과 정보 공개의 확대는 알 권리 보장의 지름길입니다.
다만 많은 언론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그 알 권리가 누구의, 누구를 위한 권리인지 불현듯 자문해보게 됩니다. 몸이 ‘불에 타는 듯한’ 아픔일 만큼 언론 보도가 국민과 괴리돼 있었던 경험을 우리 언론사는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정확한 사실과 양심에 기초할 때만 사회적 ‘공기’(公器)가 될 수 있으며. 상업주의나 정략적 이해관계에 매몰되는 순간 사회적 ‘흉기’로 돌변하고 맙니다.
우리 언론이 6월항쟁을, 그 당시의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기록할지 지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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