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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척 할까 말까…

등록 2006-09-01 00:00 수정 2020-05-02 04:24

▣ 임경선 칼럼니스트·Http://www.catwoman.pe.kr

회사를 여러 군데 옮겨다닌 전과가 있다면 명함과 아는 사람만 많아진다. 고로 그만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도 높아진다. 정말로 반가운 사람이야 근처에서 커피 한잔 하자고 바로 의기투합하고 싶지만 대부분은 적당히 가면을 쓰며 일로 만났던 사이들이다. 아직도, 혹은 잠재적으로 일로 엮일 것 같으면 하던 대로 하면 되나, 이젠 그 시효가 지나 ‘아무런 관계가 아닌’ 상황이면 조금 난감해진다. 상대가 갑을 관계에서 ‘갑’이었다면 더더욱 곤두선다. 반가운 척해, 아니면 ‘쌩까’?
아무리 그래도 우린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지금 영양가 없어도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야! 반갑게 인사하고 근황만 요점정리해주기로 한다. 다만 우울한 얘기 하면 상대가 민망해하고, 자랑해도 반칙이니까 그냥 ‘인생은 여전히 고만고만해’ 정도의 뉘앙스가 바람직하다. 마무리로 명함을 주고받고 별로 궁금치도 않은 상대 근황에 대한 추가 질문을 몇 개 던진다. 마침내 용기 있는 자가 “꼭 연락주세요.

내가 소주 한잔 살게”로 매듭지어주면 그제야 교육방송에서 봄직한 ‘예문’ 신이 끝난다. 그러나 원치 않는 명함들이 책상 끄트머리에서 과묵하게 ‘…’의 느낌으로 한 달간(남의 명함을 버리는 죄책감의 시효) 방치되어 있는 건 참 그렇다.

제일 민망한 건 예전에 우연히 만났던 사람과 또다시 맞닥뜨리는 것이다. “조만간(대체 ‘조만간’의 시효는 언제일까?) 꼭 연락할게. 점심 한번 먹어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점심 안 먹다가 다시 마주쳤을 때. 이때쯤이었던가, 나도 사회성을 포기하고 그냥 ‘쌩까기’로 전향한 게? 시력 좋은 게 참 도움된다. 반대편에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시선을 피해, 옆 샛길로 들어가버리거나, 길이 없으면 무작정 아무 가게에 잠깐 들어가 있기도 한다. 180도 돌아,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바보들도 있다. ‘빠꾸’하기도 억울한 데, 상대가 당신의 팔자걸음을 알아보고 단박에 걸신 들린 캥거루처럼 뛰어와 아는 척할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상황인가. 물론 거꾸로 상대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쇼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거다. 그냥 아는 척은 하되 인사로 시작해 인사로 끝내자고.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너무 반가워요. 잘 지내세요. 부장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등의 조합으로만 깔끔하게 가자, 이거다. 어차피 상대가 여긴 어쩐 일로 왔는지 궁금하지는 않잖아? 정 없어 보일 것 같으면 팔 부근을 살며시 잡고 반가운 듯 살짝 흔들어주면 된다. 명함은 있어도 주지 말고 상대가 요청해도 다 떨어졌다고 잡아떼라. 같이 멀뚱히 서 있는 일행을 소개시키지도 마라. 바람처럼 사뿐하게 만나고 나비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상대는 어쩌면 조금 섭섭함을 느낄 수도 있다. ‘역시 일로 만난 관계의 한계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빈말이라도 커피 한잔 하자고 물어봐야 되는 것 아냐?’ 하지만 10초 정도 지나면 우리 모두는 안도하고 저마다의 삶을 다시 살아갈 것이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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