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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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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나 농약으로 벌이 사라지는 거면 다행이겠어”

500군 중 450군의 벌이 사라진 농가… 기후위기에 관한 농민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본 것
등록 2023-02-10 07:54 수정 2023-02-20 01:20
벌이 실종돼 텅 비어버린 벌통. 이아롬 제공

벌이 실종돼 텅 비어버린 벌통. 이아롬 제공

종종 텃밭 둘레에 무성하게 자라던 풀이 누렇게 떠서 말라 죽은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밭 주인이 제초제를 뿌린 흔적이다. 밭 주인에게 연락해 제초제를 치지 말아달라고 사정했지만 우리 밭 바로 앞까지 제초제가 뿌려지고 나서 한동안 벌이 찾아오지 않았다. 벌이 사라진 뒤 늘 풍성하게 열리던 애호박에 한동안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작은 텃밭에서도 생태계는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2022년부터 환경단체 녹색연합과 함께 농민 20명을 만나 기후위기를 어떻게 느끼는지 묻는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많은 농민이 가뭄과 폭염, 폭우가 반복되는 날씨를 겪으며 수확량이 줄고, 어떤 작물은 포기하기도 했다는 경험을 들려줬다. 그중에서 기후위기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벌 농가였다.

경기도 파주와 강원도에서 꿀벌 500군(여왕벌 한 마리와 일벌 등으로 형성된 벌 한 무리를 농가에선 ‘1군’ 혹은 ‘1통’이라고 부른다)을 키우는 농민에게는 2022년 11월 한 달 동안 벌 450군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속하는 곳에서도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겨울잠을 자야 할 벌들이 꿀을 따러 나왔다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제 2월이라 남은 50통 안의 벌들을 깨워야 하는데 몇 통이나 살아남았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쏟아지는 벌에 대한 보도를 보면 벌에 기생하는 진드기와 응애, 바이러스의 세력이 강해져 꿀벌이 집단으로 죽는 ‘꿀벌 군집 붕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단다. 최근에는 소나무재선충병을 방제하기 위해 항공으로 뿌린 농약으로 꿀벌이 대량 폐사한다는 문제 제기에 항공방제를 중단하는 방안이 검토 중이기도 하다.

농민은 병이나 농약 때문이라면 대책이라도 마련할 수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란다. 하지만 날씨가 따뜻해져서 벌어지는 일은 도무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처럼 기후위기와 외부 요인으로 발생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며 양봉인들은 2023년 2월14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생존권 사수를 위한 투쟁을 앞두고 있다. 그 안타까운 현장을 눈으로 봤기에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벌을 위해 텃밭에 심어두었던 보리지. 이아롬 제공

벌을 위해 텃밭에 심어두었던 보리지. 이아롬 제공

내 작은 텃밭도 벌에게 영향받듯 벌의 결실이 꿀만은 아니다. 지금이 제철인 하우스 딸기도 벌 없이는 맛볼 수 없다. 하우스 안에서 자라는 참외나 수박, 고추도 벌이 ‘열일’한 덕분에 열매를 맺는다. 보일러 온도를 낮추고 올봄에 파종할 벌이 좋아한다는 야생화 씨앗을 추슬러본다. 올해는 과연 꿀벌이 찾아올까. 농사를 도와줄 고마운 꿀벌을 어떻게 모셔올 수 있을까. 기후위기 시대의 농사는 앞으로 더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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