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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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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박지성에게 맡겨라

맨유 ‘11월의 선수’로 꼽히며 상승세 타는 박지성의

아시안컵 대표팀 차출 반대 논란에 부쳐
등록 2010-12-22 10:06 수정 2020-05-03 04:26

지난 12월14일, 영국에서 전세계 축구팬들이 주목하는 경기가 펼쳐졌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1·2위를 다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아스널이 맞대결을 벌인 것이다.

아스널전에서 시즌 최다골 신기록 경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지난 12월14일 영국 맨체스터 올드트래퍼드에서 열린 아스널과의 경기에서 전반 41분 헤딩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지난 12월14일 영국 맨체스터 올드트래퍼드에서 열린 아스널과의 경기에서 전반 41분 헤딩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시즌 초반 독주 체제를 구축하던 첼시가 급격한 부진에 빠지며 선두 경쟁에서 이탈한 사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양 팀의 충돌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관심거리였다. 이미 세계적인 명문팀 반열에 오른 두 팀 간의 경기는 굳이 어느 한 팀의 팬이 아니더라도 축구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승부였다. 하지만 한국의 수많은 축구팬이 평일 새벽 5시에 졸린 눈을 비비며 TV 앞에 앉은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스타 박지성이 선발 출전한 것이다.

박지성은 이날 유일한 골의 주인공이었다. 전반 40분께 나니의 크로스 패스를 기막힌 헤딩슛으로 연결해 결승골을 뽑아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7만여 관중은 박지성의 플레이에 환호작약했다. 박지성의 골로 승리를 거둔 맨유는 아스널을 제치고 중간 순위 단독 선두로 도약했다. 박지성은 리그 4호골이 된 이 득점으로 올 시즌 통합 6골을 기록했다. 영국 진출 이후 한 시즌 최다골 신기록을 경신했다. 찬바람이 불면서 맹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박지성은 맨유 팬이 뽑은 ‘11월의 선수’로 선정되며 부쩍 주가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당분간 박지성은 맨유 유니폼을 입지 못한다. 대한축구협회가 박지성을 국가대표팀에 소집했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오는 1월7일부터 3주간 카타르에서 진행되는 2011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 참가한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아스널전이 끝난 뒤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친 박지성을 아시안컵에 내줘야 한다”며 한탄했다. 맨유는 긱스의 노쇠, 발렌시아의 장기 부상 등 박지성을 대신할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세계 모든 클럽은 소속 선수가 대표팀 차출 요청을 받을 경우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해당 선수를 대표팀에 내줘야 한다. 규정에 따르면, 아시안컵이나 유럽선수권대회 같은 대륙별 대회의 경우 늦어도 대회 개막 2주 전까지 선수가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이에 따라 박지성은 12월26일 선덜랜드전 이후 맨유를 떠나 대표팀 소집 훈련에 합류하게 되며, 한국이 아시안컵 결승에 오를 경우 한 달 이상 맨유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일정 충돌은 2011년 아시안컵이 중동 지역(카타르)에서 열리게 되면서 대회 시기를 겨울로 앞당긴 탓이 크다. 국가 간 대항전은 통상 유럽 리그가 쉬는 6~7월에 열리지만 이번 아시안컵은 개최지의 더운 날씨로 인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처럼 1월로 개최 시기를 변경했다.

박지성 사랑인가, 사대주의인가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를 두고 국내 팬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란이다. 박지성의 대표팀 차출을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반대론자는 한 포털 사이트에서 ‘박지성 차출 반대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수백명이 공감을 표시한 이 운동은 “대표팀 옷을 입고 아시안컵에 참가하는 것보다 맨유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국위 선양” “한창 잘나갈 때 소속팀에 기여하지 못해 향후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몸값이 떨어질 수 있다” 등의 주장 아래 세를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유럽 팀들은 공개적인 불평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이미 2년 주기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차출로 1월 공백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데다, 불평해도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두리·기성용이 속한 셀틱의 레넌 감독처럼 “보내고 싶지 않다”며 차출 반대 의사를 내비친다 해도 상위 기관인 FIFA 규정에 따라 각국 축구협회가 원하는 선수들을 보내줘야 하는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히려 한국 내에서 박지성 차출 반대 목소리가 높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박지성에 대한 애정이다. 박지성의 혹사를 걱정하는 이들은 박지성이 소속 클럽에 집중하며 오랫동안 좋은 기량을 유지하기 바란다. 둘째는 사대주의에 기반한 자부심이다. 우리의 스타가 세계 최고 클럽 중 하나인 맨유에서 주전으로 뛰며 더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를 기대하는 심정이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국가대표 축구의 약세를 반영한다. 아시안컵은 아시아 대륙 최고의 축구 대표팀을 가리는 대회로, 굳이 격을 따지자면 우리로선 월드컵 다음으로 비중이 큰 대회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1960년 이후 50년간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고, 결승 진출도 1988년이 마지막이다. ‘아시아 맹주’를 자처하는 한국 축구의 체면이 말이 아닐 정도로 아시안컵의 벽은 높다. 하지만 국내 축구 스타들이 유럽 무대로 진출하면서 국내 축구팬들의 시선은 아시안컵보다 프리미어리그에 꽂혀 있다. 정작 선수들은 대표팀 차출에 큰 불만이 없고 오히려 의욕적인 자세로 임하는 반면, 팬들이 앞장서 ‘클럽팀 우선’을 외치는 풍경은 어딘지 생경하다.

한국 축구를 대표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우승컵을 노리는 것이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보다 ‘국위 선양’에 얼마나 더 큰 기여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태극마크’가 국위 선양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던 과거에 비하면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시안컵 우승 또한 넘어야 할 벽

아쉬운 것은 선수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앞서가는 일부 여론이다. 만일 박지성이 소속팀에 전념하고 싶다면 대표팀에서 은퇴하면 된다. 하지만 아시안컵까지 주장 완장을 놓지 않겠다는 박지성은 동료들과 함께 ‘50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을 일구겠다며 의욕에 차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지성 차출 반대를 외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지성이 맨체스터에 남아 국위 선양에 힘쓸지, 카타르로 넘어와 국위 선양에 나설지 결정하는 것은 박지성 본인이다. 그리고 지금 박지성의 선택은 아시안컵이다.

서형욱 문화방송 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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