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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탄핵 Ⅱ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2-23 13:19 수정 2020-05-03 04:29

1985년 10월21일 국회에서 본회의가 열렸다. 부의된 안건 2개 가운데 하나는 헌정 사상 초유의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에 관한 건’이었다. 신한민주당 소속 102명이 발의했지만 찬성 120명, 반대 143명, 기권 1명으로 부결됐다. 다수당이자 여당인 민정당의 반대에 부닥쳤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 초기 대법원장에 취임한 유태흥씨는 이듬해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는 왜 탄핵소추될 뻔했을까? 사유는 이랬다. “유태흥씨는 최근 1985년 9월1일자 관하 일반법관 인사이동을 행함에 있어서 인천지방법원에 부임한 지 6개월에 불과한 박시환 판사에 대하여 동 법관이 즉결재판 절차에서 대학생들에 대한 유언비어 날조·유포 혐의 사실을 무죄로 판결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강원도 영월지원으로 어처구니없는 좌천 발령을 하여 제삼자도 분노할 정도의 부정의한 인사 조치를 자행하고… 또한 여사한 파행적 인사 발령은 법관의 심판의 독립성을 저해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법조 전문지인 에 기고하였다는 이유로 서태영 판사에 대하여는 새로 발령받은 날 바로 다음날인 9월2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경남울산지원으로 전격 좌천 발령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러한 보복 인사는 일찍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일이며….”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2009년 11월6일 이명박 정부에서 우리나라 헌정 사상 두 번째 법관 탄핵소추안이 발의됐다. 이강래 의원 등 106명이 낸 대법관 탄핵소추안은 엿새 뒤 ‘기한 경과’로 표결조차 없이 폐기됐다. 과반 의석을 점한 한나라당의 반대가 컸다. 그 뒤 신영철 대법관은 임기 6년을 채웠다. 탄핵소추 사유는 이렇다. “피소추자 신영철은… (2008년) 10월9일 야간집회 금지를 규정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되면서 촛불집회 관련 시국 사건의 재판이 연기되고 피고인들이 보석으로 석방되자, 10월13일 형사 단독판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석을 신중히 결정하라’는 취지로 이야기하였으며, 14명의 판사를 불러 위헌 제청에 구애받지 말고 재판을 진행하라고 독촉하였고, 같은 날 헌법재판소장을 찾아가 위헌 제청을 시급히 처리해달라며 헌법재판소의 재판에까지 관여하려고 하는 등 지방법원장으로서의 권한을 남용해 법관의 독립성과 재판권을 명백히 침해하였다.”

2018년 11월 제1238호 만리재에서 ‘법관 탄핵’을 쓴 지 넉 달이 됐다. “민주주의 원칙에 뿌리를 둔 법관 탄핵을 보고 싶다”고 썼는데 소추안은 아직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정의당이 탄핵소추 대상 법관 10명의 명단을 내놨고, 민중당은 적폐 법관 명단 35명을 공개하면서 탄핵을 촉구했다. 열쇠를 쥔 더불어민주당은 물음표다. 당대표가 나서서 법관 탄핵소추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방침은 당에서 정해졌다”며 “(명단을) 5~6명 정도로 압축했”다고 했지만, 불과 하루 만에 결정된 게 없다는 당의 공식 입장이 나왔다. 좋게 말하면 신중론, 나쁘게 말하면 눈치 보기다. 정치적 득실을 따지면서 주판알을 튕기다 빚어지는 모양새다.

34년 전 대법원장 탄핵소추는 판사에 대한 인사 불이익, 10년 전 대법관 탄핵소추는 지방법원장이 중심이 된 재판 개입이 계기였다. 지금은 그보다 몇 배나 더 엄중한 사법 농단 사태를 마주하고 있다. 구속 기소된 두 전직 대법원장과 법원 행정처장을 비롯한 사법부 수뇌부가 조직적으로 재판에 개입하는 등 헌법을 유린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야당이었을 때와 달리 꽤나 느긋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비서실 출신 법관이 당 소속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실형을 선고하자 그제야 ‘사법 농단 세력 및 적폐 청산 대책위’를 꾸리는 등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공세적 태도다. 하지만 사법 농단 연루 법관들의 탄핵소추가 김 지사 판결 불복과 접목되면서 되레 법관 탄핵의 명분을 떨어뜨렸다.

어영부영하다간 자칫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한 법관은 누구라도 수사와 재판뿐만 아니라 탄핵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국회사에 새겨넣을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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