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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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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꽃

등록 2015-11-24 17:10 수정 2020-05-03 04:28

2001년 6월, 미국에서 별천지를 봤다. 한국전 양민 학살을 규탄하는 한국인 시위대를 동행 취재했다.

뉴욕의 어느 도로 건너편에 유엔본부가 있었다. 시위대는 꽹과리를 치기 시작했다. 뉴욕경찰은 순찰차 한 대를 보내는 것으로 모든 ‘조처’를 끝냈다. 혼자 차에 탄 거구의 경찰은 햄버거 하나를 다 먹었다. 그 밖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다음날 이들 ‘전문 시위꾼’은 워싱턴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국회의사당이었다. 인원은 150여 명이었다. 경찰 4명이 순찰차 2대에 나눠 타고 집회를 지켜봤다. 경찰 4개 중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백악관까지 행진이 시작됐다. 인도를 걸었다. 경찰이 다가왔다. 뭐가 잘못됐나? “도로로 내려오세요.” 처음 신고 인원보다 참가자가 늘었으니 차도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경찰은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신호를 조작해 대열이 계속 천천히 행진하도록 했다. 연방수사국, 대법원, 재무성 등이 늘어선 도로를 걸었다. 그것이 서초동 검찰청사, 세종로 정부청사, 주한 미국대사관 앞이었다면 시위대는 차벽에 진즉 가로막혔을 것이다. 일행은 울타리 바로 너머 백악관이 보이는 곳에서 마지막 집회를 열었고, 경찰은 여전히 지켜보기만 했다.

미국 네오콘을 대표하는 부시 행정부 시절의 일이다. 오늘날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의 법원, 청와대, 새누리당, 검찰, 경찰 등이 집회·시위에 대해 최근 늘어놓은 말과 글이 모두 억측·억지·궤변에 불과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의 위정자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집회·시위에 대해 한국과 다른 잣대를 갖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근본으로 삼는 국가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집회·시위는 막을 수 없다. 집회 참가자가 공연히 행인을 폭행하거나 기물을 파괴하면 그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주요 시설이나 주요 도로 주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유로 집회를 막아선 안 된다. 그것은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월권이다. 광장에 사람 모이는 일을 틀어막는 것은 쿠데타가 계절마다 일어나는 제3세계 후진국에서나 통하는 짓이다.

집회·시위에 대해 공권력이 해야 할 일은 행인, 차량, 시위대의 흐름이 섞이지 않도록 잘 조절하고, 서로 다른 목적의 시위대가 충돌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이다. 이것에 반하거나 무시하는 모든 법령과 규칙과 관습은 ‘반헌법적 구태’일 뿐이다. 집회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동급이다.

따라서 그들은 부당하다. 이에 대한 논란을 너무 오래 붙들 필요는 없다. 이 논쟁에서 승리한다 하여 집회·시위를 위한 별천지가 벌어질 일은 당분간 한국에선 없을 것이다. 자, 부당한 폭력에 이제 어떻게 맞설 것인가.

이슬람국가(IS) 테러 직후, 희생자를 추모하러 아빠와 아들이 프랑스 파리 도심에 나왔다. 그들의 대화가 담긴 유튜브 동영상 속에서 아이가 말한다. “그들은 총을 가졌어요. 아빠, 그들은 정말정말 나빠요.” 아빠는 미소 짓는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꽃이 있단다.” 아이는 걱정스럽다. “그렇지만 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아니, 꽃으로 총과 맞설 수 있어.” “꽃으로 우리를 보호한다고요?” “그럼.” 아이 얼굴이 밝아진다.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한다. “여기, 꽃과 초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있구나.”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겐 총이 있다. 그것으로 시민을 무릎 꿇리고 있다. 우리도 총을 들 것인가, 아니면 그 무지하고 교활하고 부당한 총구 앞에 꽃을 쌓고 또 쌓을 것인가. 저항하고 싶다면 지혜롭게 저항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총과 벽으로 무장한 부당함이 천년만년 이어질 것이다. 12월5일 서울 도심에 다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꽃은 준비되었는가.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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