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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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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문학이 될 수 있을까

‘사회적 죽음’ 앞둔 사람 구조하는 1차 작업… 비명도, 비명에서 건져올린 ‘유사 사실’도 모두 글의 재료
등록 2015-10-27 17:29 수정 2020-05-03 07:17

그는 듣고 또 들었다. 온 나라를 헤집고 다녔다. 수백 개의 테이프에 목소리를 담았다. 녹음테이프 필름은 수천m에 달했다. 만남이 500차례를 넘어서면서 수를 헤아리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들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았다. 그 목소리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말했다. 전쟁, 여자들의 전쟁이었다. 높고 낮은 언덕들의 이름에서 따온, 들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전투의 이름이나, 전선·진격·퇴각 같은 단어들이 없는 전쟁 이야기였다. 어떤 전술로 사람을 죽이고 승리하고 패배했는지 어떤 장군과 총사령관이 활약했는지 같은 영웅도, 무용담도 없는 전쟁 이야기였다.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재구성하는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REUTERS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재구성하는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REUTERS

<font size="4"><font color="#008ABD">침묵도 말도 모두 텍스트 </font></font>

그가 들은 목소리들은 전쟁의 냄새와 색깔과 소소한 일상을 말했다. 차마 말하지 못해 침묵하는 순간도,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터져나오는 말들도 모두 텍스트가 됐다. 200여 명의 ‘증언’과 그 증언을 기록하는 기록자의 ‘증언’이 엮여 1941~45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 소녀병의 전쟁을 써내려간 는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밑거름이 됐다.

1983년 이 작업을 한 뒤 알렉시예비치는 10년간 소비에트 사람들 사이에서 금기시됐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역시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퇴역군인들, 전쟁 희생자들의 어머니를 만나 을 썼고, 사회주의의 본토가 몰락하자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를 썼다. 10년 취재 뒤 써낸 체르노빌 이후의 세계를 담아낸 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한국의 르포작가 송기역은 다른 인생의 목소리를 듣고 마주하는 삶의 진실에 때때로 놀란다. 송기역은 1987년 아들 박종철을 잃은 뒤 아들의 질문에 답하며 살아온 아버지 박정기의 목소리를 에 꾹꾹 눌러 담았고, 4대강 이후 강이 겪고 있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강에 사는 사람들, 강을 떠난 사람들을 통해 강의 목소리를 듣고 4대강 르포르타주 를 썼다.

어떤 목소리는 두고두고 귓전을 울린다. 서울 종로 종묘공원에서 마주한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랬다.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는 일이 글쓰기의 본령”이라고 생각해 꾸준히 해온 노인 르포의 일환으로 들른 서울 종묘공원. 처음 2주간 그는 공원을 잡지 섹션처럼 잘 구획해 나눠가진 노인들을 봤다. 종묘공원 입구 왼쪽 매점에는 야당 성향 노인들이, 종묘 매표소가 있는 외대문 앞에는 여당 성향 노인들이, 월남 이상재 동상 앞에는 종교가들이, 동상 주변에는 노인 동성애자들이 있었다. 주로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 그리고 15일째 발견한 배제의 공간에서 그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두고두고 귓전을 때리는 할머니의 목소리 </font></font>

박카스를 나눠주며 성매매를 한다고 해서 ‘박카스 할머니’라 불리는 그가 공원 안으로 들어올라치면 “어디, 감히” 남성 노인의 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깊게 듣기 위해 할머니가 지내는 낡고 허름한 여관방으로 가야 했다. “호떡 장사 하다 평화시장에서 애 업고 머리에 떡 다라를 이고, 야채 장사 하고, 오뗑 꼬아서 팔다, 멍게 장사 하다, 붕어빵 장사 하다가…” 끝도 없는 리어카 행상 인생을 지나와 할머니가 된 그는 이제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 리어카 끌다 나간 무릎을 끌고 종묘공원에 나가 몸을 판다. 그 인생을 풀어놓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은 “그래도 나 훌륭한 엄마였어. 나 잘 살아온 것 같아. 내가 행상으로 애들 다 가르쳤잖아”였다. 너무 신산해 처량한 인생살이의 회한과 더불어 그래도 잘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이랜드 투쟁,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에서 노동자·생존자 등의 목소리를 기록해온 김순천 르포작가는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이 더 많이 더 풍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사건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는 소외된 사람의 묻혀 있는 목소리가 많다. 그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일은 ‘사회적 죽음’을 구조하는 1차 작업”이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지역문학을 하며 소설과 르포 작업을 함께 하는 작가 김곰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은 매우 정직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설을 쓰다가 이야기를 엎은 경우는 많이 있었어도, 르포를 생각하고 나갔다가 이야기를 엎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현장에 나가면 무궁무진한 쓸거리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저 한갓 목소리가 문학이 될 수 있을까. 목소리는 ‘이야기의 사원을 짓는 벽돌’일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스웨덴 한림원의 올해 수상자 결정도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오랜 목소리 기록 작업을 하면서 그런 의심과 편견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목소리 속에 진짜 원본들이 있다”</font></font>

그러나 그런 질문과 편견을 마주하고 그는 꿋꿋이 ‘목소리’에 진실이 있고, 그 속에 문학이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갖고 답을 찾아갔다. “벽돌은 사원이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중략)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김순천 작가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목소리는 그저 비명일 뿐이라고, 인터뷰는 그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때로는 비명으로, 때로는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으로 다가오는 그 말들 속에 삶의 진실이 녹아 있다.”

이 7회째 공모하는 손바닥문학상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짧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혹은 세상을 구조하는 길에 들어서길 응원하고 기다린다. 그 글쓰기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전하는 논픽션도, 자신의 혹은 주변의 이야기에서 가져와 ‘유사 사실’로 만들어낸 픽션도 모두 가능하다. 조지 오웰은 말했다. “나의 출발점은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어떤 글쓰기도 괜찮다. 불의를 감지했다면, 펜을 들라.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font color="#991900">참고 도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송기역 </font><font color="#008ABD">▶ 공모 상세 안내</font>

<font color="#008ABD">대상</font>  논픽션·픽션 불문 동시대 사회적 이슈를 주제나 소재로 한 문학글

<font color="#008ABD">분량</font>  200자 원고지 50~70장

<font color="#008ABD">응모요령</font>  한글이나 워드파일로 작성해 전자우편(palm@hani.co.kr)으로 접수

<font color="#008ABD">마감</font>  11월15일(일요일) 밤 12시

<font color="#008ABD">발표</font>  12월14일(월) 발행되는 제1091호(12월21일치)

<font color="#008ABD">문의</font>  palm@hani.co.kr, 전자우편으로만 받습니다.

<font color="#008ABD">상금 및 특전</font>  대상 300만원, 가작 100만원

<font color="#991900">*수상자는 일정 기간 필자로 기용될 수 있습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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