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허슬링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꽉 막힌 한-일 관계도 ‘통 크게’ 풀어내고 나라의 운명과 미래도 ‘몸을 던져’ 이끌어가겠다는 사명감에 푹 ‘쩔어’ 있다. 그 어떤 욕을 먹든 상관없다는 기세다.
온 국민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의 ‘현란한 플레이’를 봐야 했다. 우리가 잘못해서 식민지배를 당했다는 투의 3·1절 기념사가 시작이었다. 곧이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국내 재단이 배상금을 대신 주는 방안을 내놓았다. 일본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못 듣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과거사를 지웠다. 한-일 간 여러 현안도 “선제적으로” 다 양보해주고 왔다. 그러고는 “우리 정부가 이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자화자찬했다. 외려 일본이 놀랐을 것 같다. 이런 ‘야사시이’(쉬운)한 남자 같으니.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분명히 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제3자 변제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의 권리도 건너뛰고, 참여해야 할 우리 기업의 법적 부담도 신경 끄고, 삼권분립이라는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대통령으로서 위험천만한 ‘월권’도 감수했다. 그리고 일본에 명토 박아준 건 앞으로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일까.
그것이 알고 싶어 대통령의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조급하게 ‘한-일 우호’를 서두르는 데는 우리가 모르는 중차대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국민의힘 일각에서 나오는 임박한 안보 위기든, 드러나는 것보다 더 큰 미국의 압박이든 말이다. 대통령은 출근했는지 불분명한 월요일을 지나 귀국 나흘째인 화요일(3월21일)에야 말을 했다. 들어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유와 성과는 대지 못하면서 다분히 ‘자기 추앙’에 가까운 지도자의 자세와 선언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국무회의 들머리 발언에서 20여 분에 걸쳐 내놓은 장황한 언사를 참고하면, 무책임한 전임 정권과는 달리 자신처럼 용기 있게 나서서 강제동원 관련 대법원 판결이나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같은 한-일 관계의 “걸림돌”을 제거하면, 한국과 일본은 윈윈하는 파트너로 작금의 복합위기를 군사·경제적으로 잘 헤쳐나가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미국 말 잘 들으며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플레이라는 거다.
대통령실과 외교부가 2023년 들어 가장 사력을 다하는 일은 4월 미국 국빈방문 준비란다. 일본 방문도 그 일환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에겐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 자리를 지키는 게 우리가 살길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위해 ‘고독하고 위대한 결단’을 했다고 여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비장한 표현이 나오는 게다. 하나 지지율이 떨어져도 감수하겠다는 말 외에 그가 과연 무슨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말끝마다 협력을 내세우지만 윤 대통령이 하는 건 의존이다. 힘에 대한 의존이다. 한-일 정상회담도 일본을 동아시아 지배의 대리자로 세우는 미국을 향한 줄서기였다. 이토록 다원화된 세상에서 단 하나의 해법만 있다고 여기는 건 틀렸다. 그의 말대로 “날로 치열해지는 미-중 전략경쟁”은 위기다. 그보다 더 큰 위기는 일방의 돌격대장 역할로 ‘자기 보위’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런 대통령이다. 그런 대통령이 김대중과 박정희와 처칠과 저우언라이를 들먹이며 ‘나를 따르라’고 외치니, 돈키호테가 울고 가겠다.
김소희 칼럼니스트*김소희의 정치의 품격: ‘격조 높은’ 정치·정치인 관찰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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