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4일 밤 한나라당은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단독으로 강행 처리했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 군소 정당들의 반대는 철저히 무시됐다. 강자의 폭력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사회라는 사실을 익숙하게 보여주었다. 은 줄곧 불의한 힘이 승리한 현대사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며,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민간인 학살에서 기업사회론까지 현실에 발 디딘 연구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실천을 병행하고 있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의 연재를 싣는다. 김 교수의 칼럼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는 과거의 부정의가 어떤 메카니즘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날의 MB정부에서 반복되는지를 역사적 안목과 명쾌한 분석을 통해 밝힐 예정이다. _편집자
지난해 12월8일 예산안을 비롯한 4개강 관련 친수구역 활용특별법, 아랍에미리트(UAE) 파병동의안, 서울대 법인화법 등 수십 개의 쟁점 법안을 토론 없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뒤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나는 이것이 국민을 위한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야당과의 협의 절차를 모두 무시하고, 힘의 다수를 근거로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4대강 예산을 거의 건드리지도 않은 채 강행 처리한 것을 ‘정의’라고 말했다. 당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쟁점 법안과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기로 결정했고, 애초 예산안의 회기 내 처리 지침을 내렸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폭력적 방법으로 법을 통과시킨 것을 두고 “예산안이 정기국회 내에 통과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해 사실상 이 날치기 통과는 그가 배후에서 연출한 것임을 인정했다. 한나라당 관계자도 이 대통령의 뜻이 전달되자 강행 처리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가 말한 ‘정의’는 바로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생각하는 정의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힘이 정의라는 논리 실천한 독재자들당일 국회에서 한나라당에 끌려나간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정의라는 단어가 무지를 드러내는 데 쓰인 기인한 용례”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예산안을 12월2일까지 처리하라는 절차규정을 ‘목적규범’인 양 뒤바꿔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고 성토했다. 김무성 대표의 말처럼 예산안이 정기국회 회기 내에 통과되지 않으면 나라 살림에 여러 가지 혼란과 불편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야당을 마냥 설득하는 일도 사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치기의 이유는 단지 이것뿐이었을까. 제출한 예산이 전액 확보돼야 4대강 사업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진척시킬 수 있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날치기 강행의 실제 배경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국민적 토론이 반드시 필요한 서울대 법인화법 등 쟁점 법안까지 무더기로 날치기 통과시키고도 이것이 ‘국민을 위한 정의’라고 강변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 주류 세력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파스칼은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는 일처럼 우리를 분개케 하는 일은 없고, 또 정의가 힘의 뒷받침이 없어서 정의로서 의연히 서지 못하고 불의로 몰리는 일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일제 식민지 상황, 분단 이후 한국 정치를 예상이라도 한 것 같다.
일제 관동군 장교 출신 박정희와 정치판에서 맞섰던 학병 탈출자 출신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일찍이 “우리 사회는 힘이 제일이요, 힘이 곧 정의요, 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불행하고 부조리한 생각에 빠졌다. 관민을 막론하고 권력만능, 권력숭배 사고에 빠졌다. 힘은 정의를 가져야 하고 정의는 힘을 가져야 할 터인데 정의에게 힘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게 되었다”고 파스칼을 인용해 박정희 시절의 한국 정치를 한탄했다. 일제 말 친일의 길로 간 윤치호는 힘있는 민족이 힘없는 민족을 압박하는 것은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보편적인 성질의 법칙”이라고 단언했다. 4·19 직후 김수영 시인은 “8·15를, 6·25를, 4·19를 뒈지지 않고 살아왔으면 알겠지.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만 아니면, 사람 따위는 기천 명쯤 죽여보아도 까딱도 없거든(만시지탄은 있지만)”이라고 한국에서 힘이 곧 정의로 작동했던 세태를 신랄하게 게 꼬집었다.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 등 역대 대통령은 힘이 정의라는 논리를 철저하게 실천한 장본인들이다. 전제군주 시절이나 파시즘 지도자, 군사 쿠데타 세력 등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들은 자신의 정적에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일단 무조건 잡아넣은 다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관련법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법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승만은 국회 내 반대파인 소장파 의원들을 계엄을 선포한 다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했다. 또 비판적인 언론은 ‘국시 위반’ ‘국위 손상’ ‘국가기밀 누설’ 등의 이유를 들어 위축시키고, 일제가 통감부 시절 만든 광무신문지법이나 미군정 시기의 법령까기 적용해 편집국장을 불구속 기소하였고 을 폐간시켰다. 한편 경쟁자인 신익희를 ‘뉴델리 회담설’ 조작으로 실각시켰으며 정적으로 부상한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키기도 했다.
박정희의 힘의 논리는 “칼 찬 사람이 되고 싶어” 초등학교 교사직을 던지고 만주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간 청년 시절 이래 남로당 세포로 활동한 1948년부터 전향해 군복을 벗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해 다시 군에 들어간 이후 1961년까지 생사를 넘나들며 지켜본 한국의 현실에서 철저히 체득한 것이었다. 그가 겪은 일제와 해방 뒤 한국 사회에서 힘은 좌우를 넘어섰다. 그가 남로당에 연루돼 사형 직전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도 법과 원칙이 아닌 정일권 등 지인들의 힘에 의해서였고, 1950년대 내내 군에서 출세를 하지 못한 것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힘을 갖기 위해 헌법을 무시하고 5·16 쿠데타를 감행했다. 박정희와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가재건비상조치법,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법,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등을 제정해 이 법이 제정되기 이전의 행위에 소급 적용해서 진보·혁신계 인사들을 구속하고 사형까지 시켰다. 이 경우 법치 혹은 법의 이름으로 정적이나 위험세력을 잡아넣지만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권력자의 정적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들에게 법은 정의가 아니라 ‘힘’을 포장해주는 장식품이었다.
정의의 불행, 불의의 행복광주 5·18 당시 민주화 시위를 힘으로 진압하고 시위 군중을 대량 학살한 뒤 집권한 전두환은 ‘정의사회’ 구현의 기치를 내건 다음 아예 새로운 당의 이름에 ‘정의’를 집어넣어 그 유명한 ‘민주정의당’을 창당했다. 그에 앞서 전두환은 김대중 등 정치적 반대세력을 내란음모자로 몰아 구속하고,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사회정화를 한다고 모두 해고·구속했으며, 비판적인 대학교수들을 대학에서 추방했다. 전두환 정권에 정의는 광주에서의 군홧발과 총검, 고문 도구인 물과 전기와 각목이었으며, 시위대를 정면으로 조준한 최루탄이었다. 그 시절 실정법이 곧 정의가 되어 수많은 재일동포, 교사, 납북어부가 간첩으로 조작돼 감옥에 갔으며,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고, 권인숙이 성고문을 당했다.
지난해 말 다수의 힘으로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을 ‘정의’라고 ‘정의’한 김무성 대표의 발언은 전혀 새로운 것도 놀라운 것도 아니다. 과거 그의 선배들은 군사력 혹은 폭력이 정의라고 했지만 지금은 다수가 정의라고 바꾼 것에 불과하다. 민주화가 된 이후 힘의 주체, 즉 그들이 말하는 정의의 근거와 주체가 바뀌기 시작했다. 군대, 안기부, 기무사, 경찰은 점차 물러가고 국회, 법원, 언론이 그 자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통과시키려는 법은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정치적으로 처벌하고 싶은 사람이나 집단은 세상 사람들이 기억도 하지 못하는 사문화된 법 조항을 끌어내 억지로 기소하고, 반대세력의 시위는 힘으로 진압하는 이승만·박정희식 정의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촛불시위에 유모차 끌고 나갔다고 ‘아동학대죄’로 처벌하겠다고 하고,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을 임기 종료 전에 추방할 명분이 없으니까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고 배임죄로 기소하고, 미네르바를 전기통신기본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법으로 구속하고, 무려 100만여 명이 본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김종익 사장을 대통령 명예훼손죄로 기소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명박 정부하에서 법은 정의가 아니라 정치적 반대세력, 즉 처벌하고 싶은 사람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힘을 얻으려면 무조건 선거에서 승리해야 하며, 일단 다수가 되면 힘있는 자리는 무조건 차지할 권리가 있고, 아랫사람은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 무조건 승복해야 하며,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논리가 우리 사회의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은 그리스의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프가 소크라테스에게 던졌던 질문, “정의로운 자는 불행하고 부정의한 자는 행복하다”는 공리가 맞아 들어가는 사회, 장준하가 말하는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는 사회가 되었다.
정의 없는 힘은 압제고, 힘 없는 정의는 탄핵을 당한다. 옳은 자를 강하게 하거나 강한 자를 옳게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니 필부필부들은 힘이 정의라고 생각하며 힘에 복종하는 것만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윤치호가 말했듯이 “강자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 한국 사회의 대중은 힘을 존경하지는 않지만, 살기 위해 그냥 힘에 묵종한다.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으면 저항하지만, 그것도 안 되면 극단적인 선택, 즉 자살을 택한다. 전태일을 필두로 한 노동자들의 분신은 이런 이유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한편 과거에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던 사람 중 일부는 정의를 힘있게 만드는 것이 난망하다고 판단하고 힘을 정의롭게 한다는 명분하에 힘있는 쪽으로 갔다. 그러나 힘이 어디 개인의 집합인가? 그들은 힘을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음을 절감한 다음, 자신도 결국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요, 현실적 힘이 곧 정의라고 외치는 편에 앞장서게 되었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정의가 힘이 된 순간은 짧았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힘이 정의로 행세했다. 한국의 역대 모든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은 우리 사회의 힘있는 집단이나 조직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힘있는 조직일수록 더욱 심한 불신을 당한다. 자, 이게 정상적으로 지탱되는 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국가와 법과 공권력은 군림하고 있으되 그 사회적·도덕적 기반은 치명적으로 허물어져 있다. 신학자 오거스틴은 정의가 없는 곳에는 공화국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며, 정의로운 자가 행복하게 될 수 있겠는가?
옳은 자를 강하게 하는 일파스칼이 말했듯이 옳은 자를 강하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정치의 무대에 누가 서는가,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의 문제다. 그러자면 우선 옳지 않으면서도 힘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력과 연유를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다가 탄핵당한 사람을 기억해주고 위로해주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일도 그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관심, 앎, 연대, 공감은 옳음이 힘을 갖도록 해주는 무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정치를 힘이 정의로 군림하게 된 한국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하고, 힘이 정의가 된 역사를 보며,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해야 한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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