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권력세습은 익숙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만 5천 년의 역사인데, 왕조가 마지막 숨을 쉰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다. 서구에서도 18세기 말에야 근대적 공화국이 등장했으니, 권력의 민주적 승계야말로 오히려 낯선 현상이다. 권력세습을 극복하는 건 난공불락의 성채를 공격하는 일과 같았다. 감히 국왕의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인민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주장을 펴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였다. 수많은 피와 살이 뿌려진 끝에 얻어진 그것은 과연 ‘진보’의 열매였다.
더욱이 그것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이상향이었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지속됐다면, 1980년대 군부독재가 지속됐다면, 우리는 아직도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쿠데타 동지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체제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민간인 출신 대통령을 4명째 선출한 것은 ‘진보’의 성과였다. 숱한 목숨을 바치고 고행을 자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남과 북이 싸잡아 세계의 조롱을 받는 치욕의 한반도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북한의 3대 세습에 핏대를 올리며 갖은 욕설을 퍼붓고 있는 이른바 ‘보수’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 독재 체제에 협력하거나 앞장서 저항하지 않은 이들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과장된 목소리가 자격지심으로 느껴져 측은하기도 하다.
또 한편, 진보 진영 가운데 북한의 3대 세습 문제에 뚜렷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쪽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감정적 비난과 전략적 대응은 구별돼야 한다는 점에는 백분 동의하지만, ‘왕조의 부활’이라고 할 만한 정치적 퇴행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넓게는 인류가 이룬, 좁게는 한국 현대사가 이룬 진보의 성과를 스스로 감추는 노릇이 되기 때문이다. 신이 나서 ‘3대 세습에 미온적인 좌파’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공연히 힘을 실어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나.
더 공정한 사회, 더 합리적인 사회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은 이제 권력세습 타파 따위의 의제를 훌쩍 넘어서 나아가고 있다. 정치권력의 세습만큼이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부의 세습 문제다. 서구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애써 재산을 크게 떼어 기부하거나 정부의 상속세 축소 방침을 나서서 반대할 만큼 막대한 부의 세습 문제는 과거의 권력세습처럼 불편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재벌의 경영권이 바야흐로 3세에게 자동 이전되는 현상이 가시권에 들어왔고, 이로 인한 불법·편법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사실 우리나라 재벌들이 드러내는 불법 수단을 동원한 경영권 물려주기는 이런 진지한 논의에서 취급할 필요도 없는 저차원의 문제니 제쳐두기로 하자). 정치권력과의 상대적 힘 경쟁에서 갈수록 유리한 위치를 점해가는 경제권력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부의 세습 문제는 과거 권력세습에 버금가는 인류의 숙제가 된 듯하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지금 보기엔 너무도 상식적인 왕조 타파에 수천 년의 세월이 소요됐던 것처럼, 인류의 지혜가 부의 세습 문제에 대안을 내놓고 이를 실현할 결단을 하기까지는 숱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어찌됐든 이를 앞장서서 견인할 세력은 ‘진보’라는 이름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오랜 과거에 인류의 지혜와 용기로 해결한 권력세습 문제를 두고 자격도 안 되는 자들로부터 괜시리 발목 잡히는 일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진보가 새로운 차원의 인류사적 과제를 떠맡고 나아갈 때가 아닌가.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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