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생성형 인공지능 ‘클로드’의 개발사인 미국 앤트로픽에 대규모 지분 투자에 나섰다. 연합뉴스
2026년 5월 말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주가가 급등하며 시가총액이 1조달러를 넘어섰다. 삼성전자는 이미 그 기준을 돌파한 상태였다. 세계 자본시장이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한 날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간 지속되는 초호황기)이 꺾이고, 삼성전자 주가가 5만원대로 추락하며 ‘5만 전자'라는 조롱 섞인 별명이 붙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숫자가 얼마나 극적인 반전인지 실감할 것이다.
숫자를 곱씹어보자. 현재 글로벌 증시에서 시가총액 1조달러를 넘긴 기업은 10여 곳에 불과하다. 엔비디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메타. 이름만으로도 세계 경제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기업들이다. 여기에 반도체 분야에서는 티에스엠시(TSMC)와 브로드컴, 마이크론이 이름을 올렸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와 버크셔해서웨이가 그 대열을 채우고 있다. 그 대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한국 기업이 나란히 섰다. 미국을 제외하고 1조달러 기업을 두 곳 이상 보유한 나라는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한국뿐이다. 중국도, 일본도, 독일도 아니다. 한국이다.
이것은 단순한 주가 상승이 아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오랫동안 한국 증시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지정학적 리스크, 낮은 주주환원, 불투명한 지배구조, 순환출자로 얽힌 재벌 구조. 한국 기업들은 비슷한 실적을 내고도 글로벌 동종 기업 대비 낮은 밸류에이션을 감수해야 했다. 시장은 한국을 신뢰하지 않았다. 비교해보면 격차가 선명하다. 2023년 기준 삼성전자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약 1.5배 수준이었다. 같은 시기 TSMC는 5배, 엔비디아는 20배를 훌쩍 넘었다. 기술력의 차이가 아니었다. 시장이 한국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였다.
그런데 지금, 그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변화의 핵심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AI 산업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했고, 그 수혜의 정점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었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세상을 바꾸는 동안, 그 칩 위에서 작동하는 HBM은 지금까지 SK하이닉스가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하나를 짓는 데 수만 개의 GPU가 들어가고, GPU 하나에는 수십 개의 HBM이 탑재된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메타가 AI 인프라에 쏟아붓는 자본지출(CAPEX)은 2024년 한 해에만 2천억달러를 넘어섰다. 그 거대한 투자의 상당 부분이 결국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를 향해 흘러 들어오고 있다. AI 생태계의 심장부에 한국 기술이 박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단 하나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더 나아갈 것인가? 착각해서는 안 된다. 1조달러는 도착점이 아니다.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지금 5조달러를 넘어섰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들이 막 올라선 1조달러 클럽은, 글로벌 최상위 기업들의 세계에서 보면 입구에 불과하다. 우리가 환호하는 동안 그들은 훨씬 앞서 달리고 있다. 더 높은 곳으로 가려면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역사를 돌아보면 패턴이 보인다. 1980년대 일본 기업들도 한때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권을 휩쓸었다. 엔티티(NTT), 도요타, 미쓰비시, 스미토모. 1989년 세계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중 7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를 정복한 듯 보였다. 록펠러센터를 사들이고,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인수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미끄러졌다. 하드웨어와 제조업의 강점에만 머물렀고,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소니는 워크맨을 만들었지만 아이팟을 만들지 못했다. 도시바는 반도체를 만들었지만 클라우드를 설계하지 못했다. 일본전기주식회사(NEC)는 피시(PC)를 만들었지만 운영체제를 장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훌륭한 공장을 가졌지만, 생태계를 갖지 못했다. 한국이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하드웨어의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도체를 잘 만드는 것, AI 칩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공급하는 것, 이것은 한국 기업들이 이미 증명한 역량이다. 그러나 세계 1위 기업들을 보라. 엔비디아는 칩을 팔지만, 동시에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AI 개발자 수백만 명을 자신의 플랫폼에 묶어두었다. 엔비디아의 해자는 실리콘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피스를 팔지만, 오픈AI에 130억달러를 투자하며 AI 산업의 방향 자체를 움직인다. 아마존은 물건을 팔지만, 아마존웹서비스(AWS)로 전세계 스타트업의 인프라를 장악했다. 구글은 검색엔진을 운영하지만, 딥마인드와 구글 브레인을 통해 AI 기초 연구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들은 공급자가 아니라 설계자다. 생태계의 수혜자가 아니라 생태계의 건축가다. 한국 기업들이 다음 단계로 가려면, 그 건축가의 역할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첫째 방법이 바로 인수합병과 전략적 지분 투자다.
2026년 5월28일, 앤트로픽이 시리즈H 투자 라운드에서 650억달러, 우리 돈으로 약 98조원을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투자 후 기업가치는 9650억달러, 약 1465조원에 달한다. 2021년 창업 당시 기업가치가 수억달러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불과 5년 만에 수천 배의 가치 상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AI 기업 중 하나가 그 문을 열었고, 한국 기업들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앤트로픽에 투자한 금액은 조 단위. 메모리 3사 가운데 삼성전자의 단독 투자 규모가 가장 크다고 알려졌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AI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핵심 주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선례는 이미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픈AI에 처음 10억달러를 투자한 것은 2019년이었다. 당시 많은 분석가가 “왜 소프트웨어 기업이 연구소에 돈을 쏟아붓느냐”고 물었다. 오픈AI는 그때만 해도 흥미로운 연구기관에 불과했다. 5년 후, 그 투자는 마이크로소프트를 AI 시대의 최강자로 만든 결정적 포석이 됐다. 코파일럿, 애저 AI 서비스, 빙의 부활. 10억달러의 선택이 수조달러의 가치를 만들어냈다. 구글도 마찬가지다. 2023년 구글은 앤트로픽에 3억달러를 투자했고, 이후 추가 투자로 총 20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단순한 재무 투자가 아니었다. 오픈AI에 뒤처진 AI 경쟁에서 대항마를 확보하고, 자체 AI 생태계를 보완하려는 전략적 포석이었다. 아마존은 한발 더 나아가 앤트로픽에 40억달러를 투자하며 AWS와의 기술 협력을 심화했다. 거대 테크 기업들이 AI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에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붓는 것은 단순한 투자 수익을 노린 것이 아니다. 미래 생태계의 핵심 노드를 선점하려는 전략적 포위전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앤트로픽 투자는 바로 이 계보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재무적 투자가 아니다. 이것은 선언이다. 한국 기업들이 AI 산업의 인프라 공급자를 넘어, AI 산업의 공동 설계자로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메모리를 납품하는 협력사에서, AI의 미래를 함께 그리는 파트너로 위상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앤트로픽의 클로드는 현재 오픈AI의 챗GPT와 함께 글로벌 AI 어시스턴트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기업용 AI 시장에서는 오히려 앤트로픽이 더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한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들이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단순한 재무적 베팅이 아니라 AI 산업의 미래 지형도를 함께 그리겠다는 의미다.
앤트로픽 하나로 멈춰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시작이어야 한다. 지금 글로벌 AI 생태계에는 투자할 곳이 넘친다. 엑스에이아이(xAI), 미스트랄, 코히어, 퍼플렉시티, 세이프슈퍼인텔리전스(SSI). AI 응용 분야에서는 하비(법률 AI), 시리얼(의료 AI), 커서(개발자 AI) 같은 버티컬 AI 기업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는 암(ARM) 기반의 AI 칩 설계 스타트업들이 엔비디아의 독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양자컴퓨팅 분야에서는 구글과 아이비엠(IBM), 아이온큐가 상용화의 문턱을 넘으려 하고 있다. 이 모든 곳에 한국 기업들의 자본과 기술이 닿아야 한다. 전략적 투자의 포트폴리오를 넓혀야 한다. 인수합병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2017년 하만을 80억달러에 인수해 자동차 전장 분야에 진출했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결정으로 여겨졌지만, 지금 하만은 삼성의 기업 간 거래(B2B) 사업에서 핵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후 삼성의 대형 인수합병은 사실상 멈춰 있다. SK하이닉스는 2021년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를 90억달러에 인수해 솔리다임이라는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메모리 반도체의 영역을 스토리지 솔루션으로 확장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이런 인수합병의 속도와 규모를 더 키워야 한다. AI 소프트웨어 스택, 데이터센터 냉각 기술, AI 반도체 설계 역량. 한국 기업들이 아직 취약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사들여야 한다.
역사에는 늘 이런 순간이 있었다. 1990년대 말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의 변방에서 시작해 세계 1위 메모리 기업으로 올라선 것처럼. 2000년대 중반 SK하이닉스가 파산 직전의 위기에서 재건해 HBM 시장의 절대 강자가 된 것처럼. 위기를 기회로 바꾼 한국 기업들의 디엔에이(DNA)는 검증됐다. 이제 필요한 것은 수성(守城)이 아니라 공성(攻城)이다. 지금 가진 것을 지키는 전략이 아니라, 더 큰 무대를 향해 나아가는 전략이다.
자본시장에는 ‘모멘텀'이라는 개념이 있다. 상승하는 힘은 더 큰 상승을 부른다. 그리고 지금, 한국 기업들에 역사적 모멘텀이 주어져 있다. 1조달러라는 숫자가 시장에 각인됐다. 세계 투자자들이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AI 산업의 핵심 공급망에서 한국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 모든 조건이 동시에 만족된 시점은,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역사에서 처음이다. 이 모멘텀은 영원하지 않다. 중국의 화웨이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미국의 인텔과 마이크론도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고 생산 역량을 키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우위가 5년, 10년 후에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워런 버핏은 말했다. “썰물이 빠지면 누가 벌거벗고 수영했는지 드러난다.” 지금은 반대다. 밀물이 밀려오고 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세계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고, 한국 기업들은 그 파도의 가장 앞단에 서 있다. 이 파도를 올라타는 기업과 나라만이, 다음 10년의 승자가 된다. 파도가 왔을 때 서핑보드를 들고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 기업들의 손에는 그 보드가 쥐어져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번 선택을 기억하라. 1조달러라는 숫자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생태계의 건축가로 나선 그 결단을 기억하라. 지금 한국 기업들이 내딛는 한 걸음이 10년 후 한국 자본시장의 좌표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좌표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느냐에 달려 있다.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문이 열렸다. 이제, 한국이 그 문으로 들어갈 때다.
이광수 경제평론가·‘광수네, 복덕방’ 대표
*소수의 성취보다 다수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며 투자와 경제를 이야기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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