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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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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한국에서는 쌀로 선물거래를 했다

1920년대 미두 거래 열풍 조명한 이광수 <재생>
등록 2024-06-07 06:05 수정 2024-06-14 08:00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인 인천미두취인소 옛 모습. 정해진 날짜에 쌀을 양수도하기로 약정하되, 실제로 주고받지 않고 차액을 정산하는 것으로 대부분 거래를 종료했다. 인천광역시 누리집 갈무리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인 인천미두취인소 옛 모습. 정해진 날짜에 쌀을 양수도하기로 약정하되, 실제로 주고받지 않고 차액을 정산하는 것으로 대부분 거래를 종료했다. 인천광역시 누리집 갈무리


돈과 사랑 사이에서 번뇌하다 돈을 선택하고 불행에 빠지는 비극은 대중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도입니다. 특히 조중환이 1913년 발표한 <장한몽>은 주인공 이수일과 심순애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장한몽>은 일본 소설가 오자키 고요의 <곤지키야사>(金色夜叉)를 번안한 것이고, <곤지키야사>도 영국 소설가 샬럿 브레임의 <여자보다 약한>(Weaker than a Woman)을 번안한 것이니 100여 년 전에는 동서양을 넘나들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소재인 것 같습니다. 이광수의 <재생> 역시 이런 삼각구도로 유명한데, 선물거래를 중심으로 당시의 금융과 투기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최초 곡물거래소에서 생긴 일

1920년대 중반 미국 선교사가 세운 W여학교를 다니던 갓 스물의 김순영은 공부와 음악에 재능이 있고 미국 유학길에 오를 계획입니다. 장안에 유명한 미인이라 많은 이의 구애를 받는 인물입니다. 순영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던 신봉구는 일본 경찰에 검거된 뒤 힘든 옥중 생활을 순영에 대한 사랑으로 버텼습니다. 2년 반의 수감 뒤 출소하자마자 순영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받아달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봉구가 다니는 전문학교에 재직하던 김 교수도 순영에게 반해서 미쳤다 싶을 정도로 쫓아다닙니다.

장안의 손꼽히는 부자 백윤희도 있습니다. 대정무역이라는 큰 회사를 설립한 사장이고 한성은행과 조선상업은행 등 굴지의 금융기관 이사를 겸직하는 인물입니다. 나이는 사십 줄이고 처자식이 있으면서도 수없이 기생첩을 들이고 내치던 백윤희가 순영을 간택하고 집요하게 공을 들입니다. 순영의 오빠 순기는 어떻게든 여동생을 백 사장과 연결하려고 전전긍긍합니다. 그런데 순영에게 다가가려는 세 명의 남자와 순영의 오빠까지 넷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미두 거래와 관련한 인물입니다.

인천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는 1896년 일제가 인천 신포동에 개설한 곡물 거래소입니다. 미두는 쌀과 콩(대두)을 의미하고 취인은 거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가락동 농산물시장이 먼저 연상되겠지만 이 거래소의 핵심은 선진국 상품거래소들과 마찬가지로 선물거래였습니다. 미두 대신 기미(期米)라는 단어도 쓰였는데, 이것은 미래의 정해진 날짜에 쌀을 양수도하기로 약정한 선물거래라는 뜻입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였습니다. 결제일에 쌀이나 콩을 실제로 주고받지 않고 차액을 정산하는 것으로 대부분 거래를 종료했고, 거래의 주목적은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였습니다.

일본 도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순기는 주식중매업과 금융업을 한다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금전옥답을 다 팔고 사업에 나섰지만, 미두 거래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더미에 오른 상태입니다. 그래서 백윤희에게 여동생을 넘기고 한몫 챙기려는 것입니다. 봉구는 순영이 돈에 끌려 결국 자신을 배신하고 백윤희의 첩으로 들어가자, 큰돈(500만원)을 벌어 복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름을 김영진으로 바꾸고 인천에 있는 미두취인중개점에 사환 겸 점원으로 들어갑니다. 위험이 커서 파산하는 이가 많았지만 중매점 주인 말대로 ‘장사와 벼슬이 다 막힌 조선 사람이 돈벌이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봉구의 첫 월급은 10원이고 주문을 받아오면 별도로 구전을 받았습니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아야 하는 주문도리(注文とり) 신세입니다.

전보통신을 보고 쌀값 폭락을 예상하다

봉구는 복수심에 불탔고 전문학교에서 상과(商科)를 다녔기 때문에 다른 미두꾼들과는 차별성이 있었습니다. 매일 밤늦게 귀가한 뒤에도 쉬지 않고 취인에 관한 서적과 각 신문의 경제란을 살피는 것을 본 중개점 주인 김씨는 매일 서너 차례 들어오는 전보통신문을 검토해 중요한 것을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합니다. 통신 서비스 요금이 매달 100원이니 봉구 월급의 열 배에 이르는 고가 정보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금융 데이터와 정보를 제공하는 블룸버그 터미널에 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봉구는 석 달 만에 주인의 비서 역할로 승진했습니다.

어느 날 통신문을 살피던 봉구는 ‘독일은 프랑스에 대한 배상 지급을 거절하는 결의를 했다’는 전문을 접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쳤을 짧은 통신이지만, 국제 정세가 금융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안목이 있던 봉구는, 배상 문제로 프랑스 공채 가격이 폭락하고, 영국·미국·일본 경제에도 큰 악영향을 미치리라 추론합니다. 주저하던 주인 김씨를 설득해서 갖고 있던 주식을 경성의 주식현물취인시장을 통해 모두 팔아버리도록 합니다. 이 시기 일본 정부가 대규모로 쌀을 구매할 것이라는 소문으로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었는데, 정부 매수 계획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고 쌀값도 폭락하리라 예상합니다. 봉구는 장 마감 직전에 쌀 천 석을 선물시장에서 매도하고, 주인 역시 봉구를 따라 만 석을 팔아버립니다. 이 거래로 미두취인소가 격랑에 휩싸입니다. 결산해보니 사오일 만에 주인은 주식 거래로 2만원, 미두로 3만원을 벌었고 봉구도 미두에서 3천원을 벌었습니다. 조선인이 운영하던 중매점은 일본인 중매점에 비해 이류 취급을 받았는데, 김씨의 중매점은 이 거래를 통해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사이에서도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봉구의 실력을 높게 평가한 주인 내외는 사위로 삼으려고 공들이기 시작합니다.

봉구는 중매점에서 순영을 유혹하다 실패한 김 교수가 미두 거래에 몰두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의 실력은 떨어져서(주인 표현으로는 복이 없어서) 팔면 오르고 사면 내려 손해만 본다고 합니다. 또 8월 말 무더위 속에서 백윤희와도 조우합니다. 일본어로 니햐쿠토카(입춘 후 210일 되는 날)를 앞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큰 태풍으로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본 전역(과 조선까지)에서 미두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시기입니다. 봉구는 월미도의 한 호텔 별채에서 백윤희와 만나 20만원에 쌀 10만 석 선물 매매 계약을 체결합니다. 워낙 거물이고 고액 거래이기 때문에 봉구가 고객 숙소까지 직접 간 것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갓난아기와 함께 있는 순영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감정의 파고는 높아집니다.

‘미두신’으로 불린 실재 인물 반복창

이 소설에 묘사된 미두 거래 방식, 규모, 통신문의 중요성, 위험 등은 매우 정확합니다. 봉구가 미두 거래에 뛰어들면서 ‘제2의 반복창이 되되, 그보다 더욱 큰 반복창이 되자’라고 각오를 다지는 대목이 나옵니다. 반복창은 봉구와 마찬가지로 미두중매점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대성공을 거둬 미두신(米豆神)으로까지 불렸던 실재 인물입니다. 재산은 40만원에 달했고 1921년 약관의 나이에 김후동(그녀 역시 장안 최고 미녀였고 바이올린에 능숙했던 여학생이었다)과의 결혼식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결혼식 비용으로만 무려 3만원이 들었고, 인천역에서 경성역까지는 전세 기차로, 경성역에서 결혼식이 열린 조선호텔까지는 수십 대의 자동차로 하객을 날랐습니다. 당시 경성에 자동차가 200대밖에 없던 시절이라 신문과 잡지는 반복창의 일거수일투족을 대서특필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100여 년 전 조선에는 거대한 규모의 선물시장이 있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인천 조계지와 월미도를 방문하실 때 미두거래소와 여러 은행, 주인공들이 드나들던 고급 청요릿집과 호텔의 정취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흔적이 일부는 복원되고 일부는 사라진 채 남아 있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소설가 이광수. 위키피디아 갈무리

소설가 이광수. 위키피디아 갈무리


이광수 <재생>은?

이광수는 1892년 평안도 정주군에서 태어나고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돼 사망한 소설가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후원을 받아 일본 메이지 학원에서 유학했습니다. <재생>은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가 시작됐고 1926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장편소설입니다. 연재 당시 ‘많은 학생(그중에서도 여학생)이 신문배달부를 마치 연인처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였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 <무정>(1917)은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고, 그 외에도 <유정> <흙> <마의태자> 등 많은 화제작을 남겼습니다. 2·8 독립선언 작성과 상하이임시정부에도 참여했으나 안타깝게도 1922년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이후 본격적인 친일 행보에 나섰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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