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약속이 있었다. 금요일 저녁을 같이 먹기로. 오후 5시, 이르게 만나서 불광천을 산책하고 그 자리에서 20년 장사를 했다는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가 뭐 하고 있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나무씨는 “가끔씩 저랑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산책을 하는 게 힘이 됩니다”라며 데이트의 명분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가면 그의 방이 있는 동네다. 버스에서 내려 3분 정도 걸어가면 북한산 자락이 보이는 커다란 창이 있는 오피스텔이 나온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 건물 1층에 부동산 사무실이 있고, 현관 옆에는 테이블과 벤치가 있다. 이 건물 6층에 그가 산다. 그의 방에는 수건이 가지런히 널려 있고, 어제 도착한 사이드 테이블도 조립돼 있다. 창가에는 가로 160㎝ 세로 80㎝의 컴퓨터 책상이 있고, 그 옆으로 혼자 혹은 둘이 마주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붙어 있다. 그 앞으로 2인용 소파와 티브이가 있고, 복층으로 올라가면 침대 매트리스가, 협탁 위에는 따뜻한 색 조명이 켜진 스탠드가 있다. 침대 왼편은 반려동물 공간이다. 그는 햄스터 한 마리,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 여러 마리와 함께 산다. 아래층에는 반려식물도 있다. 창가 책상 위에 하나, 티브이 옆에 하나. 싱크대에는 좀 전에 마셨는지 레몬차가 담긴 컵이 있다.
그는 지난 연휴에 챙겨준 여름옷을 꺼내 정리하고 있다. 손은 느릿느릿하고, 눈빛은 불안하다. 좀 전까지 기분이 좋았던 그다. 불안이 또 느닷없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오늘 불광천 산책은 어렵겠다. 나는 불안한 그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척한다. 대신 수건을 걷어서 접고, 그가 정리하던 여름옷을 걸고, 겨울옷은 위층 장에 넣는다. 창문을 활짝 열고, 미니 선풍기를 돌린다. 레몬이 담긴 컵을 닦는다. 화장실은 깨끗하다. 손만 씻고 나온다. 곤충 톱밥이 떨어져 있어 청소기를 아래위층을 오가며 돌린다.
그래도 그의 불안은 잦아들지 않는다. 나는 소파에 모로 누워 무음의 동영상을 본다.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야 한다. 읽던 책을 갖고 오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그는 계속 서성거린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6평 오피스텔의 좁은 주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한다. 불안한 눈빛은 계속 흔들린다. 그 사이 시간은 흐른다. 8시가 되어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집에 갈게, 내일 다시 올게.” 그는 안 된단다. 저녁 먹기로 하지 않았느냐며. 나는 다시 소파에 앉는다. 그는 외출할 티셔츠를 고르고 갈아입는다. 한 시간이 걸린다. 그 위에 입을 점퍼를 고른다. 또 한 시간이 걸린다.
드디어 오피스텔 바로 옆 블록의 고깃집으로 갔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옷자락을 계속 만지작거린다. 고깃집 문 앞 전봇대 옆에서 갈등한다. 들어갈까, 말까. 자리에 앉는 데까지 38분이 걸렸다. 주인장은 먹자 말자, 앉느니 마느니 하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 안 드셔도 되니까 여기 앉아서 말씀 나누세요” 하면서 살얼음이 올라간 사이다를 갖다준다. 주인장이 뚜껑을 따서 사이다를 잔에 따라준다. 그는 계속 고민 중이다. 무엇을 시킬까, 1인분을 시킬까 2인분으로 해야 하나 사이에서. 나는 묻고, 기다리고를 무한 반복한다. 머릿속은 복잡하다. 다음 진료가 언제더라, 의사에게 약을 다시 증량하자고 해야겠군, 이렇게 따로 사는 것이 맞을까, 사람들에게 나무씨는 어떻게 보일까, 그게 뭐 대수라고, 좀더 뻔뻔해져야 하는데 그게 안 되네, 아직도 수용이 안 되는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고기는 1인분으로 결정했다. 내가 말 한마디 없이 고기를 굽고 있으니 주인장이 사이다 한 병을 더 갖다준다. 주인장은 “어머니께 한잔 따라 드리세요”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사이다를 따른다. 나는 앞으로 나무씨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스물아홉 살 이 청년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사이다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사이 나무씨는 맛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고기를 다 먹었다.
방으로 돌아와 저녁 약을 먹고, 양치하고, 손발을 씻고 눕는 아들에게 “잘 자, 꿀잠 자. 내일 또 올게” 하고 방을 나섰다. 11시50분이다. 딸이 차를 가져왔다. 오빠는 괜찮냐고, 내겐 고생했다고 했다. 9분 거리의 집으로 돌아와 세수를 하고 타이레놀을 한 알 먹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다. 그래도 자야 한다. 내일은 불안하지 않은 아들과 오늘 하지 못한 데이트를 마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자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지키면서, 다른 누군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상상해보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그게 다예요.”(<타인을 듣는 시간>, 200쪽)
나는 내 자리를 충실하게 지키고, 그의 질병을, 불안을, 경험을 상상해보려고 애쓸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다음날 우리는 만났다. 초저녁이었다. 혹시라도 몰려올지 모를 불안을 피해야 한다. 고깃집 주인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나무씨에게 선물이라며 마늘장아찌를 싸준다. 혼자 밥 먹을 때 반찬 하라며. 우리는 고기 2인분을 먹는다. 머리를 맞대고,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하호호 웃으면서 먹는다. 이렇게 또 시간이 흐른다. 어제를 견뎠으니 오늘이 있다. 나는 나무씨의 불안을 상상해보려고 애쓰고, 그는 나의 경험을 상상해보려고 애쓸 것이다. 서로 스승이 되어준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의 축복이다.
윤서 여성학 박사
*정신병동에서도 아이는 자라요: 16년째 조현병과 동거하는 28살 청년 ‘나무씨’(가명) 이야기를 어머니 윤서(필명)가 기록한 글. 조현병을 앓는 나무씨의 시점에서 이지안이 그림을 그립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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