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제 살 깎아먹기를 두려워 말라

등록 2007-04-20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디지털 카메라의 자기잠식 효과 이겨낸 코닥의 혁신… 필름회사에서 디지털 기업으로 변신</font>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이주의 용어

<font color="#216B9C">자기잠식 효과(cannibalization)</font>

경영학에 ‘자기잠식 효과’(cannibalization·동족 포식)라는 말이 있다. ‘식인 풍습’을 뜻하는 ‘cannibal’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용어다. 식인종이 자기 종족을 잡아먹듯이, 어느 기업이 도입한 신기술이 자기 사업 영역을 갉아먹는 현상을 설명한다.

모든 신기술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자기잠식 효과가 있다. 그런 신기술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대부분 기술 기반 기업의 고민이다. 예를 들면 필름회사가 디지털 카메라라는 새로운 기술을 맞닥뜨렸을 때, 자기 살을 깎아먹을 그 기술을 받아들여 사업화해야 하느냐, 아니면 최대한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열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느냐 사이의 고민 말이다. 세계 최대 필름회사이던 코닥이 실제로 맞닥뜨리고 있던 고민이다.

[%%IMAGE4%%]

실패로 끝난 ‘포토CD’

2003년 9월, 필름회사 코닥은 투자자와 소비자, 그리고 직원들 앞에 폭탄선언을 했다. 더 이상 필름에는 중요한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대신 스스로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 파는 회사”로 새로 자리매김시켰다. 동시에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프린터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뜻을 밝혔다. 120년 동안 필름으로 성장하고 생존했던 기업이 ‘역사적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코닥도 처음부터 용기를 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디지털화 선언까지 오는 과정은 길고도 험난했다. 코닥이 처음 신기술을 맞닥뜨렸을 때 했던 선택은 오히려 폴라로이드의 선택에 가까웠다. 신기술이 가져올 자기잠식 효과를 최대한 피하려고 미적거렸다.

처음 디지털 카메라 열풍이 불기 시작할 때, 코닥 경영진은 직감적으로 필름 사업이 머지않아 위기에 처할 것임을 직감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디지털 카메라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닥 같은 규모의 기업이 디지털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하면, 디지털 카메라가 너무 빨리 확산돼 필름 시장이 급속도로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따랐다. 바로 ‘동족 포식’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또 하나는 최대한 필름 사업을 지키면서 규모가 축소된 전통 기업으로 남아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자연사로 가는 그 길을 선택하자고 투자자와 직원들 앞에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경영자는 없었다.

코닥이 선택한 것은 제3의 길이었다. 디지털 카메라에 본격적으로 투자하지도 않았지만, 디지털 기술을 무시하지도 않는 길이었다.

코닥은 1990년, ‘포토CD’라는 신기술을 개발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스캔해 CD 형태의 매체에 담으면, 그 사진을 프린터로 인쇄하거나 컴퓨터 화면으로 보거나 텔레비전에 연결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새로운 표준이었다.

필름 카메라와 코닥필름 사용자는 갖고 있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되, 현상소에 가서 디지털식 저장을 한 뒤 여러 가지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코닥의 설명이었다. 코닥은 이를 위해 새로운 인화기를 개발해 보급했다. 사진을 프린트할 수 있는 프린터와 포토CD를 텔레비전에 연결할 수 있는 비디오 형태의 기기도 개발해 보급했다.

즉, 디지털 기술을 받아들이되 그 기술이 필름을 반드시 거치도록 새로운 표준을 고안해낸 것이다. 신기술을 받아들이면서 그 신기술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자기잠식 효과를 최소화하는 표준이었다. 이 표준을 스스로 만들어 시장에 보급하고 일반화한다는 게 코닥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코닥의 야심 찬 시도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소비자들은 굳이 필름을 사서 필름 카메라로 찍은 뒤 그것을 새로운 기기에 넣고 감상할 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그 기기를 사기 위해 500달러를 들이고 포토CD를 구입하기 위해 장당 20달러를 지불할 의사는 더욱 없었다.

소비자는 오히려 디지털 카메라를 사들였다. 처음에 수천달러(수백만원)대이던 디지털 카메라 가격은 빠르게 떨어져서, 곧 포토CD 재생기 가격인 500달러(50만 원)에 맞먹게 됐다. 사진을 찍으면 바로 컴퓨터에 저장돼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고, 인쇄도 자유로웠다. 필름이라는 귀찮은 매개체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1993년까지 계속되던 포토CD의 실험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수년 동안 방황하던 코닥은, 결국 시장에 항복 선언을 하고 기업 변신의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구조조정과 수혈을 해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말하자면 피를 흘리며 제 살을 깎아먹어서라도 기업을 살리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뼈를 깎는 변신 끝에, 이제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 시장의 강자로 자리잡고 있다.

제3의 길도 우회로도 없다

신기술이 기존 사업을 깎아먹기 시작할 때, 기업에는 제3의 길도 우회로도 없다는 사실을 코닥의 사례는 보여준다. 기존에 갖고 있던 것을 모두 가지고 가면서 새로운 시장에서도 성공하는 방법은 없다는 이야기다. 코닥이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존의 길로 접어든 순간은, 바로 제 살 깎아먹기를 시작한 때였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