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레놀·하얀 바나나 우유처럼 소비자의 마음에 틈새를 만들어 파고드는 전략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아스피린을 복용해서는 안 되는 수백만 명을 위해서….” 광고는 이렇게 시작했다. “복통을 자주 경험하시는 분, 위궤양으로 고생하시는 분, 천식이나 알레르기 또는 빈혈 증상이 있으신 분은 아스피린을 복용하기 전에 의사와 상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스피린은 위벽을 자극하고 천식이나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며 위장에 내출혈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구는 이랬다. “다행히도 여기 타이레놀이 있습니다.”
[%%IMAGE4%%]
정치나 정책에서도 흔히 등장
아스피린이 두통약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던 시절, 타이레놀이 등장하면서 내세운 광고였다. 전형적인 재포지셔닝 전략이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아스피린에 맞서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알리면서, 시장을 쪼개어 그 한 영역을 점령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전부를 점령하고 있던 아스피린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리의 일부를 내줘야 한다.
타이레놀 쪽이 기대했던 대로, 이 광고가 나간 뒤 타이레놀 매출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미국 해열 진통제 시장에서 1위는 아스피린이 아니라 타이레놀이다. 효과적인 재포지셔닝 전략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아스피린 쪽에서도 이 주장을 반박하는 광고를 게재하며 반격에 나셨다. “타이레놀은 아스피린보다 안전하지 않습니다!”라는 헤드라인을 내세우면서, 미국 정부가 타이레놀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단했다는 내용의 광고를 일간지에 실었던 것이다.
그런데 효과는 아스피린 쪽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타이레놀의 재포지셔닝 전략을 오히려 도와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전까지 고객들 머리 속에는 아스피린밖에 없었다. 그러나 타이레놀의 도발과 아스피린의 반격 뒤, 해열 진통제 하면 ‘아스피린 대 타이레놀’이라는 구도가 떠오르게 됐다. 고객들 마음속에서는 완벽한 재포지셔닝이 일어난 것이다.
할인점에 가면 수천 수만 개의 상품과 그 각각의 브랜드가 진열되어 있다. 모든 분야에서 경쟁은 점점 심해진다. 신규 진입자가 끼어들 틈은 점점 사라져간다.
현실에 틈새가 거의 없다면, 가장 효과적인 시장 진입 방법은 소비자 마음속에 틈새를 만드는 것이다. 고객 마음속의 경쟁 상대들을 움직여 틈을 만들어내면서, 그 틈새에 빠르게 들어가 자리잡는 전략이다. 이게 바로 재포지셔닝 전략이다.
재포지셔닝은 정치나 정책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성공할 수 있는 게 정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많이 사용되는 ‘친생명’(pro-life)이라는 구호가 그렇다. 낙태를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 구호는, 낙태 인정이 불가피하다는 사람들을 ‘반생명’(anti-life)주의자로 재포지셔닝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다.
낙태 용인이 불가피하다는 사람들의 대응도 재미있다. 이들은 순순히 ‘반생명’이라고 낙인찍히는 대신, ‘친선택권’(pro-choice)이라는 구호를 새로 만들어냈다. 또 하나의 범주를 만들어내면서 재포지셔닝을 꾀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친생명 대 반생명’의 구도를, ‘선택권 인정 대 선택권 불인정’으로 바꾸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전략이다.
재포지셔닝을 꾀하는 마케팅은 이데올로기 시장뿐 아니라 상품 시장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바나나 우유인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도 재포지셔닝 전략을 사용한 전형적 사례 중 하나다. 바나나 우유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야 할 근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장에 빈틈이 별로 없다. 그러니 새로운 바나나 우유로 시장에서 승부를 보려면, 경쟁자들을 재포지셔닝할 필요가 있다.
이때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는 바나나 우유 시장을 ‘노란 우유’와 ‘하얀 우유’의 대결 국면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적 목표를 세운 것이다. 하얀 우유는 단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노란 우유이니, 이렇게 재포지셔닝이 이루어지고 나면 하얀 바나나 우유를 선택하는 소비자는 자연스레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를 구매하게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전략일 것이다.
먼저 남들의 자리를 재배치하라
‘하루야채’는 그저 야채주스일 뿐이지만, 주스 시장 전체를 재포지셔닝하려 시도하고 있다. 소비자 마음속의 주스 시장을 ‘그냥 주스 대 하루 종일 먹을 야채 성분을 모두 담은 주스’로 재편하려는 것이다. 상점에서 팔기보다는 아침 일찍 집이나 직장으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도 재포지셔닝 전략의 핵심이다. 맥주 미켈롭은 “지금까지의 모든 맥주는 부드럽거나 풍부한 맛이었다… 미켈롭은 풍부하면서 부드러운 맛이다”는 내용의 광고로 맥주 시장 재포지셔닝을 시도했고, 프리미엄 맥주 시장을 여는 데 성공했다.
재포지셔닝 전략은 쉽게 이야기하면 소비자 마음속의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으로 경쟁하겠다는 전략이다.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그리고 모든 자리는 상대적이다.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먼저 남들의 자리를 재배치하라.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수도권 ‘첫눈’ 옵니다…수요일 전국 최대 15㎝ 쌓일 듯
검찰, ‘불법 합병’ 이재용 2심도 징역 5년·벌금 5억원 구형
문재인 전 대통령, 이재명 무죄에 “다행…부당한 검찰권 행사”
새가 먹는 몰캉한 ‘젤리 열매’…전쟁도 멈추게 한 이 식물
‘기억·니은·디읃’…KBS 한글날 엉터리 자막에 방심위 중징계
유승민 “일본에 사도광산 뒤통수…윤, 사과·외교장관 문책해야”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단독] 사도광산 추도식 2주 전 부랴부랴 피해자에 연락한 윤정부
세계 5번째 긴 ‘해저터널 특수’ 극과 극…보령 ‘북적’, 태안 ‘썰렁’
[영상] 이재명 ‘위증교사’ 무죄…법원 “통상적 요청과 다르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