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를 소비자로 만드는 정치 마케팅… 비누처럼 팔려나가는 대선 후보들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후보들은 마치 비누처럼 마케팅되고 팔려나간다.” 세계적 마케팅 대가 필립 코틀러의 말이다. 소비자가 여러 비누 중 자신이 사용할 비누를 선택하는 과정과 유권자가 선거에서 여러 후보 중 대통령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는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유권자는 정치 소비자가 된다. 후보들은 정책상품 패키지가 된다.
이명박의 타깃 마케팅, 문국현의 인지도 전략
후보가 상품이라면, 상품을 팔아야 하는 선거 캠프는 마케팅팀이 된다. 당연히 자기 후보를 잘 팔기 위한 전략이 수립되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서로 자기 회사 비누를 더 많이 팔려고 마케팅 전략을 짜고 광고를 하고 언론 홍보를 하는 경쟁사의 마케팅팀처럼 말이다.
이런 마케팅 전략은 유권자 가정으로 배달된 이번 대선 후보들의 책자형 선거공보에서도 다양하게 드러난다. 선거공보를 통해 그 ‘마케팅팀’의 속내를 파악하면, 유권자 입장에서는 그 후보의 객관적인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명박 후보의 선거공보는 매우 전략적으로 설계됐다. 특히 전형적인 타깃 마케팅 방법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 책자형 선거공보의 한 장을 넘기면 바로 ‘2030’ 페이지가 나온다. 미혼의 20대와 30대 젊은이를 타깃으로 삼은 페이지를 따로 만들어둔 것이다. 이 페이지의 사진에서 이명박 후보는 빨간 모자를 삐딱하게 돌려 쓰고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웃고 있다. 그리고 ‘열정’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취업과 관련된 자신의 공약을 나열해두고 있다. 한 장을 넘기면 바로 ‘3040’ 페이지가 나온다. 이곳의 키워드는 ‘사랑’이다. 여기서 이명박 후보는 흰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어린이들 사이에 앉아 있다. 그리고 교육 관련 공약이 나열돼 있다. 선거공보는 4050, 6080까지 이어지면서 타깃 홍보를 이어간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나이가 표시된 두 페이지만 읽으면 이 선거공보는 끝이다.
이명박 후보의 타깃 마케팅의 압권은 책자형 선거공보의 뒤표지다. 뒤표지는 전적으로 군인을 타깃으로 만들어져 있다. 군복을 입은 이명박 후보 사진이 등장하고, 군인들에게 쓴 이 후보의 편지가 게재돼 있다. 17대 대통령선거 전체 유권자는 3765만 명인데, 이 중 군 부재자투표 대상자는 51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명박 후보는 이들을 정확하게 타깃으로 잡은 마케팅 전략을 펼친 것이다.
정동영 후보의 책자형 선거공보에는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여기저기 엿보인다. ‘동행’이라는 최상위 콘셉트 아래, ‘땀’ ‘꿈’ ‘집’ ‘힘’ 네 개의 하위 콘셉트를 결합했다. 특히 네 개의 하위 콘셉트는 한 음절에 같은 각운을 갖도록 설계돼 있어 발음을 통해 기억을 더 쉽게 만들어주도록 하고 있다. 제품 브랜드명에서나 제품 이미지 광고 콘셉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계다.
정책 공약을 운율화하는 노력까지 보인 것은, 인지도는 높으나 지지율이 낮은 이유가 ‘콘텐츠 부족’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그 약점을 보완하려는 마케팅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권자 머릿속에 어떻게든 정동영 후보의 정책이 자리잡도록 만들어서, 콘텐츠 부족이라는 이미지를 털어버리려는 것이다.
문국현 후보의 책자형 선거공보에는 정치 경험이 적어 인지도가 낮은 문 후보 쪽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 장을 넘기면, “문국현, 따뜻한 나라를 만들 따뜻한 사람입니다”라는 문구와 문 후보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가득 찬 페이지가 등장한다. 정책보다는 인물을 알리는 데 초점을 둔 마케팅 전략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정책은 여러 분야를 나열하기보다는 ‘500만 개 일자리’ 하나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역시 인지도가 낮기 때문에 다양한 정책 소개로 관심을 분산시키기보다는 하나의 명료한 정책으로 일단 인지를 시키겠다는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소비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제품을 광고할 때, 제품의 성분을 나열해서는 크게 주목받기 어렵다. 제품 생산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소개하거나, 다른 제품과 명백하게 차별화된 하나의 특징을 내세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회창 후보와 권영길 후보의 책자형 선거공보는 잘 알려진 두 후보의 특징을 각각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반듯한 대한민국”이라는 테마로 ‘대쪽’ 이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권영길 후보는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이라는 구호 등으로 기존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갈수록 고도화하는 심리 게임
그러나 이회창 후보나 권영길 후보나 이미 두 번의 대선 출마를 통해, 반듯한 이미지나 서민적·진보적인 이미지가 이미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둘 다 좋은 마케팅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박카스’ 같은 제품을 마케팅하면서 그저 피로회복제라고 강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박카스가 젊은이들에게 좋다”고 강조하는 식으로 새로운 마케팅 포커스를 찾아야 새로운 소비자를 끌어모을 수 있다.
서구 정치 마케팅 이론에서 정치인이 비누로 비유되는 데는, 사실 정치인들이 비누처럼 미끌거리면서 핵심을 잘 빠져나간다는 비아냥이 숨어 있다. 마케팅이 소비자를 속이는 행위인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돕는 행위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있다. 비누 같지 말아야 할 정치인들을 비누처럼 팔려고 마케팅 전략을 짜는 게 올바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정치 마케팅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후보와 정치 소비자 사이의 심리 게임도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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